[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제천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처음 찾은 날, 고백하건대 적잖이 당황했다.
제천 시내의 모습은 그저 일상적인 소도시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메가박스 제천은 복합상영관이라지만 여느 동네 영화관보다 협소했고, 눈에 띄는 풍경이라곤 재래시장이 전부였다. '제천 풍광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라는 원망(?) 섞인 생각이 한참동안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제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아직 국내에서 개봉되지 않은 다양한 영화를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주제 아래 잘 짜여진 영화 프로그램을 감상하는 것은 그저 어쩌다 소일거리 삼아 영화 한 편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선사한다.
주변 풍광에 대한 아쉬움을 애써 뒤로 한 채 '영화제에 왔으니 일단 영화부터 보자'며 마음을 추스리고 극장 안에 들어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난 후 제천은 '시네마천국'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개막작 <서칭 포 슈가맨>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시스토 로드리게즈라는 70년대 미국 포크록 가수의 행방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발매된 로드리게즈의 앨범은 비평가들로부터는 찬사를 이끌어 냈지만 가수가 라틴계라는 이유로 당시 대중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했다. 로드리게즈는 대중 속에서 곧 잊혀졌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황폐한 풍경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시적인 가사가 뜻밖에도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음반 발매 후 20년이 지나서야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서의 인기를 알게 되고, 남아공 사람들은 전설이 된 가수 로드리게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영화 속에 삽입된 로드리게즈의 곡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깊은 울림이 있는 가사와 진정성 가득한 목소리는 인종분리 정책에 억눌린 남아공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천에서 영화를 보는 한국 관객들까지 숨을 멎게 했다.
영화에 인터뷰어로 등장하는 중고음반가게 주인의 멘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모든 혁명은 노래를 가지고 있다.' 로드리게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아공 혁명의 불씨가 됐다. 마치 옛 소련연방의 빅토르 최처럼.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 중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대목은 바로 로드리게즈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로드리게즈는 미국에서의 음반 실패 후 수십년 간 평범한 노동자로서 살아간다.
'아마도 나는 오늘 사라질 거야'라고 시작하는 로드리게즈의 노래 '아일 슬립 어웨이(I'll sleep away)'의 가사가 삶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생각을 대변한다. '당신은 성공의 상징을 유지해 갈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난 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해 나갈 거야. 당신은 시간과 일상을 지켜나갈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난 내 흩어진 모든 꿈들을 수리하러 갈꺼야.'
첫번째 앨범의 제목처럼 로드리게즈는 그렇게 '차가운 진실(Cold Fact)'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놀랄만큼 매력적인 음악이 한참동안 스크린을 배회하다 마침내 사라지고 스크롤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있었음이다.
로드리게즈 말고도 제천음악영화제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음악가들은 하나같이 영혼에 크고 작은 울림을 선사했다. 영화 <유시 뵤를링>에는 스웨덴의 국민 테너였던 유시 뵤를링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으로 연명하며 형제들과 함께 스웨덴 전역 투어를 나서는 모습이 담겨 애틋한 감정을 자아낸다.
<야샤 하이페츠-신의 바이올린>이란 영화는 차가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자주 오해받는 야샤 하이페츠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감정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음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린다.
제천에서 만난 음악영화를 통해 유명세 속에 숨겨진 예술가의 내면,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훌륭한 프로그램 덕에 짧은 시간만으로도 가슴이 금새 풍요로워졌다.
덧붙여 제천 풍광에 대한 첫 인상도 결국 '오해'였음을 밝힌다. 소박한 제천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림같은 풍경의 의림지와 청풍호가 다양한 야외공연 프로그램으로 단장한 채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을 반겼다. 시원함을 머금은 나지막한 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