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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이야기)강남역 8번 출구 반올림 농성장
2017-03-08 06:00:00 2017-03-08 06:00:00
꽃샘추위가 갑자기 덮친 강남역 8번 출구 앞, 삼성의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 백색의 방진복 차림의 수백 명이 모였다. 지난 3월 6일, 10년 전 23살의 나이로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10주기 추모행사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추모행사 도중에 사회자가 민주당의 양향자 최고위원의 말을 전했다. “(반올림이) 전문시위꾼처럼 귀족노조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하는데 유가족도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된다.” 반올림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라는 단체다. 반올림은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와 함께 516일째 삼성왕국이 들어선 강남역 8번 출구에서 농성 중이다. 
 
그가 한 번이라도 강남역 8번 출구에 와 봤을까? 번듯한 천막 하나 칠 수도 없었다. 파라솔 두 개를 기둥 삼아서 비닐을 얼기설기 덮어서 지붕을 만들었고, 바닥 난방도 안 되는 채 2평도 안 되는 그곳에서 교대로 지킨다. 그나마 이 비닐 천막을 치기까지 삼성의 경비, 강남구청, 경찰의 등쌀을 이겨내야 했다. 한시라도 비웠다가는 이들이 언제 천막을 걷어치울지 몰라서 24시간 천막을 지켜야 하는 그런 곳이다. 이게 귀족이 사는 집이라면 양향자 씨가 사는 집은 왕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기 천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는 ‘바보들’이 모여든다. 건강하고 착하기만 했던 황유미 씨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상고 졸업도 하기 전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가난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이 벌어서 동생 학비도 대고, 결혼자금도 마련하려고 그랬다. 그런 그는 입사한 지 채 2년도 안 돼서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렸고, 다시 2년도 안 돼서 아버지의 개인택시 뒷좌석에서 병원 다녀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런 아버지가 10년째 농성을 하면서 삼성의 답을 기다린다고 했다.
 
추모행사에서는 황유미처럼 삼성반도체, 삼성LCD 공장에서 휘귀성 질병으로 숨져간 79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이숙영은 30살, 최혜련은 황유미와 같은 23살, 올해 사망한 김기철은 31살이었다. 2,30대가 유난이 많고, 백혈병,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형, 종격동암, 폐암, 유방암 등등 암 종류의 휘귀성 질병들이 유난히 많다. 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삼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강남역이 어떤 곳인가? 서울에서도 가장 화려한 밤거리를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외치는 행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뜨아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삼성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그 돈으로 권력까지 부리는 재벌이다. 삼성의 장학생들이 정치권만이 아니라 정부, 언론사, 사법부에까지 즐비하다. 이번에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구속된 일이 계기가 될까? 삼성이 미래전략실을 폐쇄하는 걸 보니 변화의 바람이 불기는 하나 보지만, 꼼수를 부리지 않고 진정으로 사죄하고, 산재를 인정하고, 보상을 제대로 해주고,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영업기밀”이라고 우기지 않고 공개하는 일이 일어나야 진정한 변화가 아닐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기업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직원들을 진정 “또 하나의 가족”으로 대하는 일의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5백일 넘게 한겨울 추위도 견디며, 한여름 땡볕도 견디며 강남역 8번 출구의 초라한 농성장을 황상기 씨와 반올림 식구들이 지키는 이유다.
 
양향자 민주당 최고위원은 강남역 8번 출구에 가 보시라. 거기 어디에 귀족노조 연하는 반올림이 있는지. 그곳에서 돈보다는 사람의 생명과 노동자의 인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는 바보들을 만나시라. 그 바보들이 10년 동안 외치면서, 5백 일 동안 기다리면서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사람의 말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시라. 그 바보들은 오늘도 초라한 천막을 지킬 것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억울한 이들을 기억하라며 행진할 것이다.

박래군 뉴스토마토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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