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세상읽기)남편들이여, 조금 더 살자!
입력 : 2017-08-11 06:00:00 수정 : 2017-08-11 06:00:00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여인들이 은밀히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당당히 출판된 책제목이다. 나도 남편의 한 사람으로서 책제목을 보고서는 모골이 송연했다. 큰 글씨로 당당하게 박힌 세 줄짜리 제목과는 달리 10포인트의 평범한 명조체로 구석에 달린 부제는 '독박 육아, 독박 가사에 고통 받는 아내들의 속마음'이다.
 
일본 작가가 썼다. 2014년 12월 일본에서는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남편'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 1위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떴다고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남편 가운데 "우리 집은 상관없어."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표하는 분은 없기를 바란다. 남편이 죽기를 바랄 정도면 차라리 이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따지지도 마시라. 이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정이 많고, 또 많은 문제는 남편이 죽으면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에 이런 바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곧 결혼 28주년을 맞는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니고 조금 일찍 결혼했다. 어디 괜찮은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히 놔두던가. (풉!) 지난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면 내 아내도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충분히 했을 것 같다. 28년 동안의 만행을 아주 조금만 고백하겠다.
 
결혼할 때 아내는 어엿한 직장이 있었고 나는 취직은커녕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상태였다. 결혼 후 두 달 있다가 나는 입대했고 아내는 얼마 동안 시부모를 모시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제대 후에도 아내는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지방대학 강사인 내 밥상을 차려줘야 했다.
 
아내가 임신했다. 직장생활도 계속했다. 남편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매일 늦게 들어왔다. 공식적으로는 혁명과 개량을 위한 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술 모임이었다.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두고 유학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와 달리 남편의 유학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아내를 독일로 불렀다. 아내의 경력이 단절되었다. 아내는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오로지 집에서 애만 봐야 했(으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가끔 공장에 나가서 일도 해야 했)다.
 
귀국했다. 큰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둘째는 "아이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야한다"라는 철학이 있다기보다는 유치원 보낼 돈이 없는 관계로 다섯 살까지는 집에서 돌봤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왜 이렇게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은지! 이 와중에 남편은 온갖 정치 모임을 빙자한 동네 술친구 모임에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큰애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이의 앞날에 참견하지 않고 자유롭게 키운다는 핑계로 정말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든 부담은 아내 혼자 졌다.
 
아내는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었다. 혼자 아이를 키웠고 혼자 양가 부모를 챙겼다. 도대체 아내는 나와 결혼해서 무엇을 얻었을까? 물론 사랑해서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 호르몬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결혼생활은 우정과 습관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김정은과 트럼프처럼 우리 부부도 레드 라인을 넘어서고 있지 않은지 따져볼 때다.
 
나는 이미 늦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남성들은 이미 늦었다. 아내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희미하게 적혀 있다. 다만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 이제 몇 년 후 은퇴하고 집에 있으면서 하루 세끼를 차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 희미한 문장이 또박또박 타자 글씨로 적힐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난 결혼생활을 차분히 정리하는 순간 그 문장을 입으로 뱉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할 말이 있기는 하다. 우리가 뭐 일부러 야근하고 회식을 즐기기만 했겠는가. 그러지 않고는 세상살이를 할 수가 없다. 우리라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독박 육아 독박 가사를 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 간단하다. 우리 세대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젊은 세대는 어쩔 수 있게 해주면 된다.
 
온갖 제도들은 이미 있다. 남성 육아휴직이 좋은 예다. 제도가 있으면 뭐하나. 눈치가 보이는데… 승진에 불리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이 팍 주는데… 젊은 남편들을 번민에 빠지게 하지 말자. 선택하게 되어 있는 제도를 의무화하고 보상하자.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면 경제가 돌아가겠냐고 말이다. 그 말이 딱히 옳지는 않지만 설사 경제가 조금 어려워지더라도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내가 늘어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조금 더 살고 싶은 남편들이여, 지금부터라도 아내에게 잘하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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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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