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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3화)유민으로 산다는 것
“먼 서역의 고선지는 모래바람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2017-10-16 11:20:27 2017-10-16 15:31:38
서기 751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탈라스(Talas) 전투는 동서 문명교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군이 이슬람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중국은 실크로드의 경영권을 상실하게 되고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세계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설이 존재하긴 하지만 학계의 통설에 의하면, 제지술이 중국에서 서방으로 전파된 계기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끌려간 2만여 당나라 군사들 속에 있던 제지기술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이가 바로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었다.
 
고선지 군대, 힌두쿠시산맥을 넘다
탈라스 전투에서는 비록 패했으나, 수차례의 서역원정을 성공시킴으로써 당나라의 지배력을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으로 확장시켰던 이가 고선지(?~755)이다.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의 여러 사료들에 등장하는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하서에서 안서로 이주해 나이 20여 세에 장군에 제수되어 아버지와 관품이 같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구당서> 권104 열전, 고선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대대적으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669년(총장 2년)에 대한 다음의 기록들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총장(總章) 2년 고구려 백성 3만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신당서> 권220 열전, 동이 고려(고구려를 지칭)). “(총장 2년) 5월경자(庚子) 고려의 호(戶) 2만8천2백과 수레 1천8십 승, 소 3천3백 두, 말 2천9백 필, 낙타 6십 두를 옮겨 내지로 들게 하였는데 내주와 영주에 평소대로 파견하고 강·회의 남쪽과 산남, 병·양의 서쪽 여러 주(州)의 공한처(空閑處)에 안치하였다”(<구당서> 권5 본기 고종 하).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 유민들을 산남·경서·하남·농우 등 곳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려는 목적과 황무지 개간, 토번(티벳)과 돌궐 등의 이민족으로부터 당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복합된 것이었다. (이하, 고선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지배선 교수의 <고선지 평전>, 청아출판사, 2002를 참조. 저자는 <구당서>를 비롯한 중국 사료들의 고선지 기록이 편파적으로 기술되었다는 점과 이를 그대로 수용한 서구학자들의 연구가 가진 문제점들도 잊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고선지는 개원(開元, 713~741년) 말기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와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고(<구당서> 고선지), 천보 6년(747년) 당 현종이 조공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소발률국(小勃律國, 파키스탄 북부의 길기트) 정벌을 명했을 때는 ‘활동 영역의 제한이 없는’ 행영절도사로 임명된 상태였다. 당시 소발률국은 토번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유대를 강화하고 토번에 조공을 바쳤으며 토번의 서역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고선지가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고원의 힌두쿠시산맥을 넘은 것이다.
 
저 파미르고원을 넘어
힌두쿠시를 넘어
아흐 숨막혀라
천룡도 번쩍 뽑아들어
아라비아사막 사라센제국과 맞닥뜨린 사람이 있다
그가 고구려 포로 유민의 자식 고선지였다
 
당 현종은 장안 가까이
화청지에 납시어 자욱한 연꽃 바라보며
황금 술잔을 들어올리는데
 
바로 그 시각
먼 서역의 고선지는 모래바람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의 천리마 비지땀 번드르르 흘리며
(‘고선지’, 10권)
 
안서도호부에서 출발한 고선지 부대는 얼음으로 뒤덮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100여 일의 대장정 후 오식닉국(아프가니스탄 북동부와 타지키스탄 남부의 산간 지역)의 특륵만천(테레만)에 도달한다. 중간중간 경유지에서 보급을 받고 휴식을 취했겠으나 1만의 군사와 1만의 말, 식량과 사료, 군수물자를 실은 말들이 깎아지른 듯한 준령을 넘어가는 장정은 과연 역사 속에 기록될만한 압도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특륵만천에서 전열을 정비한 고선지 부대는 파미르고원의 험한 산세 속에 위치한 토번의 서북방 요새 연운보(파키스탄에 접한 아프가니스탄 지역)를 함락하고 소발률국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는데, 이때 넘은 고개가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해발 4,694미터의 탄구령이다. 당시 고선지가 계속되는 험산 준령의 행군에 지친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지략을 펼친 일화는 유명하다. 즉, 자신의 심복 기병 20명을 본대보다 앞서 보내 아노월성호(소발률국 수도 아노월 성에 사는 오랑캐)로 위장케 하고 본대 앞에 나타나 그들을 환영하는 것처럼 연극을 꾸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한 것이다. 고선지 군이 토번 정벌에 성공함으로써 토번은 서역의 지배권을 당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서역의 72개국이 당에게 조공을 바치게 된다.
 
고선지(?~755)는 1300년 전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 유민이다. 사진은 지난 2010년 KBS가 공사창립 37주년을 맞이해 기획해 방영한 3부작 특집 프로그램 ‘고선지 루트’속 전투씬. 사진/뉴시스
 
고구려 유민들의 상이한 삶
당의 서역 진출을 가능케 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나, 고선지의 최후는 모함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라는 출신성분이 당나라 관료와 장수들로 하여금 그를 더욱 질시하게 만든 요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고선지의 전 상관이었던 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은, 이전 상관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고선지의 공적을 조정에 알려 그를 지원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고선지가 토번 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첩서를 자신을 통하지 않고 조정에 직접 상주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狗腸高麗奴)과 같은 욕설을 퍼부었는데(<구당서>, 고선지), 사실 그도 한족은 아니었다.
 
고선지는 천보 9년(750년) 12월, 당에 대해 번신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즉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이유로 석국(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정벌에 나서 이듬해 석국, 돌기시(돌궐의 일부)와 주변 9개국을 정복하고 석국의 왕과 돌기시의 가한(카간)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보낸다. 당나라 조정은 석국의 왕을 처형했고 이를 계기로 당과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연합세력이 751년 7월 말경부터 5일 동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서역의 새 강자로 부상한 사라센 제국의 안서사진 공격을 차단하려 했던 고선지의 당나라군은 갈라록(카를룩, 돌궐의 지파) 부족의 배신으로 전쟁에서 패하고 이로 인해 당은 중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고선지는 755년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 안록산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라는 현종의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환관 변령성은 고선지가 전략적으로 섬주를 포기하고 동관으로 후퇴해 반란군을 몰아낸 것을 황명 거역으로, 군수 물자가 있는 태원창이 반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관물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를 불사른 것을 군량 탈취로 모함해 황제에게 보고한다. 변령성은 토번 원정 때 황제로부터 고선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고선지 부대와 동행했던 자로, 고선지가 연운보를 점령하고 계속 진군하려 하자 토번의 공격이 두려워 이를 반대하고 연운보에 남았던 인물이다. 원정이 성공한 후 고선지를 시기한 부몽영찰로부터 한때 그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나 결국 황제에게 고선지를 모함함으로써 현종의 명을 받아 칼잡이 100명을 데리고 와 고선지의 목숨을 거두고 만다. 이때 고선지가 휘하 사졸들에게 “내게 죄가 있으면 너희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원통하다고 외쳐라”라고 말하자 군사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외치지만(<신당서> 권135 열전, 고선지), 그는 결국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당나라의 충신으로 죽고 말았다.
한편, 이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고구려 유민들도 있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놈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 … >
고구려땅은 한사군 이래 다시 되놈이 차지했다
그것으로 안 놓였던지
고구려 유민 4만여호를
당나라 강회 산남 남쪽 황무지에
끌어다가 버려두었다
백제 유민 양자강 유역에 끌어다가 버려두었다
고구려는 다시 일어난다
고구려는 다시 일어난다
고구려놈의 씨를 끊어라
그러나 당나라의 동북정치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흉노와 서번 또한 큰 걱정이었고
나라 안의 정세 심상치 않았다
이때 고구려 유민의 장로 걸걸중상이
원한에 찬 유민을 일으켜
거란족과 내통해놓고
되땅 강회와 산남을 떠나 장정에 나섰다
옛 땅으로 돌아가며 싸웠다 싸우며 갔다
그리하여 당을 쳐 이기며
옛 땅에 닿아서 창을 세웠다
그러나 늙은 혁명가 걸걸중상은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마지막 천문령싸움에서 이긴 뒤
태백산 동쪽 동모산 기슭 해란강 서고성자에
고구려 이어 발해나라 세웠다
비로소 삭풍에 원한 진 등을 식혔다
그리하여 고구려 후대의 철광 개발
큰 땅의 철기문명을 이룩하고 순정의 시를 노래하였다
북조 발해의 위업 2백년 찬란하건대
이른바 춘추필법이여
어찌 이 일을 오랑캐의 행티라 내쳤는가
(‘늙은 혁명가 걸걸중상’, 3권)
 
698년에 건국된 발해는 고선지가 활동하던 시기 제3대 문왕(대흠무)의 치세 하에 놓여 있었다. 당에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꾸준히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쳤던 아버지 무왕(대무예)과는 달리,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내치에 집중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926년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존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에 고선지가 있었더라면 당과 발해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하지만, 최소한 당의 서역 진출 역사는 조금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고선지가 활동하던 시절 발해와 당의 관계는 우호적이었고 이미 당나라에 뿌리박은 고선지 집안이 발해로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696년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족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하던 시기에, 고선지의 운명은 다른 곳에서 부친 고사계를 따라 이미 다른 방식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정체성의 문제
고구려 유민 출신이 당나라에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려면 무장(武將)으로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고,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나라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선지는 유민 출신이라는 천대 속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아버지처럼 그 길을 따라갔을 뿐이다. 지배계층의 내분으로 전쟁에 지고 패망한 고구려의 백성들은 당나라 내 이리저리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물론 당에서 호의호식하는 삶을 누린 고구려 지배세력도 있다). 혹자는 고구려 부흥운동에 가담했고 혹자는 당나라 백성으로 살았으며 또 혹자는 새로이 건설된 발해의 백성으로 살았다. 당이나 신라에 편입되어 살거나 발해의 백성으로 살면서 누군가는 고구려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살았겠으나,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들의 후손은 그저 당의 백성, 신라의 백성, 발해의 백성으로, 그리고 이후에 또 어느 나란가의 백성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실, 국경이 수시로 뒤바뀌는 분쟁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고대의 농민들의 경우, 어느 나라의 백성으로 불리는가보다는 안정적으로 땅을 경작해 가족이 생계를 잇는 일이 훨씬 중요했을 법하다.
 
지난달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정착 80주년 고려인 희생자&독립운동가 국제추모대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고구려 유민의 역사는 스탈린 시대에 일본의 첩자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강을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고 그 후손들은 중국의 조선족으로, 러시아의 고려인으로 남았다. 그들은 중국인이 되었고 러시아인이 되었지만 늘 ‘소수민족’이라는 꼬리표가 부과하는 조건과 제약 속에 한 세월을 살아왔다. 조상의 조국인 남한과 북한에 친연성은 있으나 정체성을 공유할 수는 없다. 흘러간 세월만큼, 상이한 사회 환경만큼 서로가 낯설어진 후손들이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백성들을 이리저리로 내몰리게 했던 내 나라의 역사를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발해의 유물·유적들이 중국 역사의 일부로 소개되는 것을 볼 때, 혹은, 대한민국의 국적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일본의 국적도 거부한 채 불이익을 감수하며 '구 조선호적등재자 및 그 자손‘인 ’조선적‘으로 남은 재일조선인들을 생각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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