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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기업 이사회에 노동자 참여 본격화할까?
국민연금, KB 임시주총서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 선임 찬성 이후 논란 확대
내년부터 공공기관 시작으로 노동이사제 확대도입
2017-12-04 08:00:10 2017-12-04 08:00:10
지난 11월 20일 KB금융지주 임시 주주총회에는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 선임안이 올라왔다. KB금융노조가 주주제안권을 활용해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사외이사로 추천한 것이다. 선임안은 출석 주식 수 대비 찬성률 17.73%로 부결됐다. 사외이사 선임안이 통과되려면 출석한 의결권의 과반수 이상 및 발행주식총수의 4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찬성을 얻어야 한다. 9.68%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 주주 국민연금의 찬성까지 얻었지만, 나머지 주주의 동의를 얻지 못해 의결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부결’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노조 추천 이사 선임안에 동의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노동이사제 찬성이 사실상 국민연금의 공식입장임이 확인된 셈이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계획과 맞물려 노동이사제 확산 움직임
KB금융의 노동자 추천 이사 선임안이 부결로 끝났지만 이번 사안을 기점으로 노동이사제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KB 사태’로 불거진 노동자 추천 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한 노동이사제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강조했다.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제를 공공부문부터 시작하여 4대 재벌과 10대 재벌 순으로 점차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실제로 지난 7월 발표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는 “2018년부터 공공기관 감사 독립성 강화 및 노동이사제 도입을 통한 공공기관 지배구조 개선”이 명시됐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서울시가 한 발 앞선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2014년에 도입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지난해 조례를 제정하여 현재 공공부문에서 노동이사제(서울시 공식명칭 근로자이사제)를 시행 중이다. 이에 따라 근로자가 100명 이상인 공공기관에서 노동자 대표 1~2명이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하는 서울시 산하 투자·출연 기관 16곳 중 12곳에서 실제로 이사 선임을 마무리한 상태다. 나머지 기관에서도 빠르면 연내에 이사선임이 완료될 예정이다.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도입 배경에는 ‘갈등비용’이 있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사회 갈등수준은 경제협력기구(OECD) 27개국 중 2위이다. 갈등으로 발생한 사회적 비용은 매년 최대 246조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갈등원인 중 상당부분을 노사분규가 차지하고 있어 서울시는 노동이사제 도입이 갈등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예측한다.
 
유럽에서는 보편적으로 노동이사제 적용
서울시의 노동이사제는 국내 최초 사례이지만,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 OECD에 가입된 유럽 18개국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시행중이다. 독일은 1951년 종업원 1000명 이상의 광산, 철강 분야 기업을 대상으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했으며, 1976년에 2000명 이상 민간 기업으로 도입대상을 확대했다. 스웨덴은 1972년에 100인 이상 기업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였으며, 이후 적용대상 기업을 확대해 현재에는 25인 이상 모든 기업에서 노동이사를 둔다. 프랑스는 1983년에 공공부문에서 먼저 도입한 후, 2013년에는 민간 부문으로 확대하여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이사제는 가장 선진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독일식 모델을 참고한다. 독일에서 이사회는 감사 이사회와 이사회로 구성되는데, 이 중 감사 이사회의 이사를 노측과 사측이 동수로 채운다. 노측의 이사를 사측과 동수로 구성함으로써 경영 투명성과 민주적 의사결정력이 제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각에서는 감사 이사회가 ‘감사’ 역할만을 수행하기에 노동이사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독일 기업의 감사 이사회는 기업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이사의 선임권, 주요경영전략의 결정권, 경영에 대한 조사 및 평가권을 갖고 이사회의 상위기관으로 기능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도입이 추진되는 노동이사제나 노동자 추천 이사제는 사외이사 중 1명을 노측으로 구성토록 했다.
 
“공장 문 앞에서 멈춘 민주주의를 공장 안으로”
노동이사제 도입의 핵심적 기대 효과는 사외이사 기능의 정상화이다. 그동안 한국 기업의 사외이사는 대부분 기업 오너의 의지가 반영된 ‘정실 이사’로 채워져 사외이사제 도입 취지를 무색케 했다. 실제로 코스피시장과 코스닥시장 상장기업 882곳 중 지난해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 의견을 한 차례 이상 표명한 적이 있는 기업은 전체의 2.8%에 그친다. 사외이사가 거수기 또는 고무도장에 비유되는 이유이다. 노동자 대표 혹은 노동자 추천 인사가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면, 이사회 기능이 일부 정상화하면서 비윤리적 경영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동이사제 도입의 다른 근거로는 경제적 효율성이 제시된다. 기존 경영진이 갖지 못한 노동자의 관점과 지식, 경험이 생산성, 품질, 안전 등 성과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효율은 아니지만, 서울시의 주장처럼 노사 갈등비용을 줄여 전체적으로 효율성을 제고하는 한편 사회적 효용을 늘릴 수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권 사항이 증대하고 이로 인한 노사갈등이 커지고 있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노사의 의견을 사전 조율하여 노사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데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노동이사제의 의미는 노사관계나 갈등비용과 같은 경제적 영역 밖에서도 발견된다. 무엇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 체제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점이다. 즉 경제적 측면에서 장점을 발휘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비영리 연구 및 컨설팅 조직 ‘텔루스 연구소’의 마조리 켈리는 그의 저서 <주식회사 이데올로기>에서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공장 문 앞에서 멈춘 민주주의를 공장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재계 “경영 효율성 저해” 반발
 
노동이사제에 반대하는 재계의 목소리도 거세다. 경영 효율성을 저해하고,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가로막는다는 게 재계가 내세우는 이유다. 또한 사측의 ‘고유’ 권한인 경영 판단과 인사권을 노조가 침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우려한다. 대한상의는 지난 2월 제출한 ‘상법 개정안에 대한 경영계 의견’를 통해 근로자 대표 내지 추천자 사외이사 의무선임에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의견’은 “회사 발전보다 근로자, 소액주주 이익만 주장해 의사결정의 지연과 왜곡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독일 등 유럽식 모델을 한국에 적용 가능한 것인지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유럽과 한국의 역사, 기업문화가 달라 그대로 받아들여선 무리가 생긴다는 주장이다.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독일과 달리 한국은 노사 관계는 적대적이어서 기본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다. 임금 및 단체협상을 산별노조에서 책임지는 비율이 높은 독일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개별 회사별로 노사협상이 진행된다는 점 또한 중요한 차이점이다. 노조가 임금 인상 등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해 경영진의 판단에 어깃장을 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전문가들은 노동이사제를 한국 실정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현재 도입안의 부작용을 과대 해석해선 안 된다고 경계한다. 노동자 대표 혹은 노동자 추천 이사를 한 명 선임하는 것은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KB금융 임시주총에서 국민연금의 노동자 추천 사회이사 선임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을 “수탁자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한 출발점”으로 평가하며 “국민연금이 보유 지분을 이용해 기업들의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이사제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보다 발전된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용자에서 노동자로, 나아가 기업의 이해관계자들로 이사회 구성 범위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노동이사제를 포괄하는 이해관계자이사제, 사회책임이사제가 도입되어야 한다”며 “노동자의 이해가 기업·사회의 이해와 일치되는 접점이 모색된다고 가정해야 하지만, 때로 특정한 구조에서 노동자의 이익이 사회와 기업의 이익과 배치될 수 있기에 주주 노동자 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포괄하는 사회책임이사제가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여의도본점에서 열린 2017년 KB금융지주 임시주주총회 모습. 이날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 선임안이 올라왔다. 사진/뉴시스
 
송은하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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