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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문명으로 읽는 기업)⑫SK, 사대교린의 틀에서 벗어나라
2018-07-09 07:00:00 2018-07-09 07:00:00
SK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가장 공을 들였던 사업은 해외자원 개발이었다. 동시에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분야도 해외자원 개발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의외로 실패하는 사례도 많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세계경영'을 외친 대우의 사례를 보자. 대우의 실패는 한국 대기업들의 독특한 경영전략과 기업문화를 잘 설명해준다. 대우는 199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찾았다. 이 나라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는 부패한 권력이 등장했고, 경제적으로 대규모 자본투자가 필요했다. 이때 대우는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서 공격적인 글로벌 투자를 감행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런 전략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세계경영의 다른 두 길, 몽골과 한국 기업
 
원래 세계경영은 몽골제국의 국가경영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 대기업과 몽골제국의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자신이 믿는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를 평등하게 대우하느냐, 자신보다 나은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를 구분해 차별하느냐의 차이다. 이것이 몽골을 세계제국으로 만들었고, 대우 등 한국 기업에는 좌절을 안겼다. 한국의 글로벌 이중성은 조선의 대외정책이었던 '사대교린'에서 역사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몽골은 '텡그리'라는 자신들의 신을 기준으로 송나라와 요나라, 서하 등을 비롯한 중국, 이슬람권, 동유럽 등과 대외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조선은 중국에는 사대하고 일본과 여진 등 조선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국가에는 교린정책을 추구했다. 14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이중적 외교정책을 추진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 더구나 외부 패권국가의 강압이 아닌 스스로 제후국이라고 선언한 유일한 국가가 조선이었다. 문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해석하는 조선 조정의 철학과 시야였다. 조선을 건국하고 설계한 사람들은 중국이 강요한 천자와 제후국의 권력질서를 그대로 수용했다. 본래 성리학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라는 내용이 명문화되지 않았다. 천명은 언제나 움직이고 천심과 민심을 따르는 사람이 천자라면, 그는 조선에서도 중국에서도 여진에서도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자들은 스스로를 제후국의 위치에 가뒀다. 
 
사대교린의 결과는 조선에 재앙이 됐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요동을 포기하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시작으로 사대교린의 기조는 16세기 동아시아 지도를 완전히 바꿨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급격히 쇠퇴하자 대안 세력으로 조선과 청나라가 부각됐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했다. 명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제후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반면 청나라는 제후국이 아닌 천자국을 자임했다. 이 생각의 차이가 청나라를 16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조선은 이번에는 청나라에 사대하는 굴욕적인 외교를 반복했다.

한국인 의식에 남은 사대교린…"선진국에는 굽실, 후진국에는 떵떵"
 
조선 망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0년이 흘렀지만 사대교린의 폐습은 한국인의 의식에 여전히 남았다. 사대의 대상이 미국과 일본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사대교린을 비즈니스 모델로 해석하면 '추격자 전략'이 된다. 대우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의 경영실패는 추격형 전략의 이중성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선진국 시장에서는 기업윤리를 지키지만, 개발도상국 등에서는 적당히 대충해도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사진/뉴스토마토
 
SK의 기업리더십을 동아시아 문명론의 기업 생애주기에서 보면 '둔(遯)괘'에 해당한다. 이것은 생애주기가 늦여름을 지나 초가을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기업의 경영상태와 실적 성장세가 한풀 꺾이는 상태다. SK가 글로벌 경영환경에 적절하지 대응하지 못하면 성장이 정체되는 국면을 맞을 수 있다. SK는 지금은 흑자기업의 외형을 유지하지만, 글로벌 경영환경은 흑자기업도 한순간에 적자기업으로 전락할 만큼 요동친다. 그래서 '피한다', '물러난다'는 의미를 가진 '둔괘'는 SK의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SK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SK브로드밴드의 광고였던 '생각대로'를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 해외자원 개발사업 등이 왜 실패했거나 지지부진했는지 그 이유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실패의 중심에는 한국인들에 뿌리 깊은 '사대교린'의 이중성이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파트너를 만났을 때는 사대의 의식이 자라나고, 중국과 베트남 등의 파트너와 만났을 때는 교린의 의식이 움튼 것은 아닌지 자성해야 한다. SK뿐만 아니라 대부분 한국 대기업의 해외사업은 이런 생각의 방식과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글로벌 비즈니스 마인드는 이중적인 결과를 낳기 쉽다. 여기서 탈피하는 것이 SK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물러남'의 지혜를 고민해야 할 SK 기업리더십
 
SK는 추격형 사업모델에서 잠시 물러나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국내 대기업들은 그간 선발주자의 사업 아이템을 모방·발전시키는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이는 경영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혁신형 경제에서는 생존이 어렵다. 시장 변수에 따른 영향을 추격자들이 더 크게 받는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삼성SDI가 이미 진출한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늦게 진출했다. 하지만 아직 성과는 미미하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은 LG화학이 1.2GWh(세계 시장점유율 7.7%)로 세계 5위, 삼성SDI는 0.8GWh(5.2%)로 6위, SK이노베이션은 0.5GWh(3.2%)로 9위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인 중국이 한국의 사드배치 여파로 한국산 배터리에 빗장을 걸면서 SK이노베이션의 사업 진행에 차질까지 생겼다.
 
1973년 최종현 선경직물(현 SK그룹) 회장이 수출의 날을 맞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이런 경영환경에 맞닥뜨린 SK를 동아시아 문명론의 관점에서는 '둔괘'라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피하다', '물러나다'는 의미로 해석할 게 아니다. '둔괘'는 세상이 귀찮아서 내 몸이나 편안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잠깐 쉬면서 장차 도리를 펼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 난세에는 심혈을 기울여 힘써도 세상을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평정할 수 있는 도를 닦아 전해야 한다. 이를 <주역>에서는 '소이정(小利貞)', 즉 "적게 정(貞)하는 것이 이롭다"고 말했다. 산이 높아 보이지만 산 위에 올라가면 산보다 하늘이 훨씬 높이 있다. 그래서 '천산둔(天山遯)'이라고 하는데, 덕을 깊이 닦음으로써 소인이 그 덕에 감화되어 저절로 경외하게 됨을 뜻한다. 군자가 세상을 피하는 요령이 이와 같다. 범인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도 범인들이 존엄성을 느껴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 SK의 기업리더십이 새로운 경영전략으로 '사회적 가치'를 모색하는 것은 '물러남'의 경영방식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추격형 사업모델과 이익 극대화 전략이 아니라 세계의 소비자와 시민들과 공유할 새로운 사업모델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 신중하게 할 글로벌 전략
 
SK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밝고 있는 형상인 '이(履)괘'다. 이것은 일이 진척되지 않고 어긋나니 멈춰 있으면서도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호랑이는 동물 중에서 사람에 가장 위협적이다. 때문에 호랑이 꼬리를 밟고 있다면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해야 한다. 갑자기 물지 않도록 함부로 밟을 게 아니라 조심성 있게 밟아야 한다. SK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내수형 사업에서 탈피,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포화된 국내시장을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처참했다. 언론보도를 보면 지난해 SK플래닛 글로벌홀딩스가 709억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SK텔레콤의 다수 해외 계열사가 적자를 냈다. SK텔레콤은 국내 1위 이동통신 사업자를 넘어서 해외로 발을 뻗었지만 미국과 중국, 동남아 시장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6월21일 SK텔레콤은 인공지능(AI) 서비스 용량을 5배 늘려주는 'AI 가속 솔루션'을 개발, 자사 AI 서비스 '누구'에 적용했다. 사진/뉴시스
 
해외시장에서의 실패는 지금 SK가 호랑이의 꼬리를 밟고 있는 형국과 같다. 큰 일을 해나갈 때는 단계마다 꼼꼼하게 진행해야 한다. 과감함과 도전정신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호랑이 꼬리를 밟은 것 같이 조심성 있는 자세도 필요하다. SK가 또 다른 해외시장 진출 전략을 찾고 있다면, 이괘에서의 가르침대로 해야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SK의 계열사는 '항(恒)괘'에 있다. 한 가지만 꽉 붙잡고 그게 영원할 것처럼 고집을 부리면 불통이 되지만, 시기가 변동하는 것을 알고 여기에 발맞추어 나가만 수억만년이 지나도 형통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SK는 원래 M&A를 통한 성장한 회사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했고, 1994년에는 민영화 대상이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품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2006년 인천정유(현 SK인천석유화학), 2007년 하나로텔레콤(현 SK브로드밴드), 2012년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 2014년 바이오랜드(현 SK바이오랜드)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OCI머티리얼즈(현 SK머티리얼즈)를 인수했고, 카셰어링 업체 쏘카의 지분 20%도 매입했다. 하지만 모든 M&A가 SK의 뜻대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정부가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를 불허하면서 에너지, 반도체와 함께 그룹의 성장축인 정보통신기술(ICT) 사업의 성장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SK의 계열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나서 기후와 풍토가 다 바뀌고 사상과 문화가 변한다는 점이다. 그에 맞게 행동해야 형통할 수 있다.
 
2017년 6월19일 최태원 SK 회장이 '2017 확대경영회의'에서 사회와 함께하는 '딥 체인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진/SK그룹
 
이혼과 가족 계열분리 등 급격한 변화 전망…협력사들도 영향
 
SK의 협력사들은 '환(渙)괘'에 해당하다. 이 글자는 흩어진다는 뜻인데, SK의 기업리더십이 급격한 변화를 맞으면서 협력사들도 이합집산하게 된다는 의미다. 특히 SK의 기업리더십은 가족문제가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총수의 이혼문제는 개인만의 문제를 넘어 SK의 소유권과 경영권 조정으로 결말 날 수 있다. 협력사들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흩어지는 데에도 여러 길이 있다. 물 위에 바람이 휙 불면 수면의 먼지가 날아가고 맑은 물만 나타난다. 맑은 물은 바람을 만나면 넘실거린다. 모여 있을 때는 그리운 줄 모르다가 흩어지면 그리워진다. 따라서 흩어지는 것은 그 속에 그리움을 담고 있음과 아울러 다시 규합하려는 의지가 보다 더 강해진다. 동아시아 문명론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정성을 다할 것을 주문한다. 강한 정성으로 일을 해나가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환(渙)이라는 글자는 '흩어진다'는 말과 함께 '형통하다'는 의미도 있다. 흩어지면 모여야 하고, 모이려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SK 구성원들은 '풍(豊)괘'다. 태양이 부지런히 밝게 비추려면 해가 중천에 떠 있어야 하듯 중정한 도(道)로써 밝게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러면 광명이 비추지 않는 데가 없다. 가는 곳마다 밝게 하면 보다 더 풍성하고 큰 것을 이룩하기 마련이므로 일이 형통하게 된다. 재산이 많더라도 관리를 잘못하면 병폐가 나고, 약간 부족하더라고 관리를 잘하면 활용할 데가 많아진다. 직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일하는 요령도 달아져야 한다. SK의 직원들은 초가을을 지나고 겨울이 오는 것을 미리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 임채원은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 20여개 중앙·주정부의 정책 어젠다를 공동 연구하는 '비교어젠다 프로젝트'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참여 중이다. 이번 기획은 필자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연구와 실천을 토대로 동아시아 문명의 가능성과 미래에 관해 <뉴스토마토>에 격주로 총 13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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