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김지운 감독 신작 ‘인랑’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조직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이란 수식어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허무주의’ 색채가 워낙 강했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 각본이란 점에서 원작 ‘인랑’은 마니아가 워낙 두터운 작품이었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무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원작 애니메이션 속 결말은 지금도 충격적이다. 주인공 ‘후세 카즈키’의 공허한 눈빛과 선택의 증명은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18년 전이 지난 현재까지 강렬함을 전하고 있다. 당시 원작 ‘인랑’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지금도 느끼고 있는 지점이다.
‘장르의 마법사’로 불린 김 감독은 ‘인랑’ 프로젝트를 상당히 오랫동안 이끌어 왔다. 실사화가 진행되면서 궁금했던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원작 속 질문에 대한 주인공의 선택과 원작의 시그니처로 불린 지하수로 세트 그리고 강화복이다.
먼저 원작 배경이다.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힌 패배주의에 신음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최대 전환기 ‘한국전쟁’을 통해 급속도로 사회 구조가 변화했다. 흔히 버블 경제로 불린 이 시기를 통해 일본 사회는 독특한 구조를 구축했다. 전쟁 전후 세대 차이, 경제적 부의 가치 세대 차이, 나아가 집단과 개인의 관념 차이가 공존한 체계가 돼 버렸다. 원작 ‘인랑’은 이 지점을 파고 들었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이 연합군 측이었단 가상의 설정과 일본이 독일 지배를 받은 뒤 벗어난 지 얼마 뒤의 일이다. 세력간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고뇌하며 번민하는 개인의 가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전한다. 물론 결말은 역설적이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세계관이 또 다시 완벽하게 투영된 스토리였다. ‘절대 가치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무의미하다.’ 이 문장은 김 감독의 실사 영화 ‘인랑’에도 투영된다.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늑대’란 내레이션은 중요한 포인트이자 지점이다.
영화 '인랑'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김 감독의 ‘인랑’은 원작 속 혼란에 대한 배경을 위해 ‘통일’을 끌어 들인다. 열강의 틈바구니 그리고 동아시아 일대 강대국 이익 논리에서 아직까지도 한반도 통일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를 추진하는 남북 정상과 막으려는 주변 열강의 경제 제재 조치, 급속도로 악화된 국내 경제. 결국 통일 추진 반대 세력 ‘섹트’, 이를 막으려는 경찰 내 특수조직 ‘특기대’, 정보기관 ‘공안부’ 등장한다. 원작과 같은 설정이다. 물론 현재 한반도 정세와 분위기 속에서 ‘인랑’ 속 설정은 단순하게 SF장르적 화법이라고 하기엔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통일에 따른 통일에 따른 경제적 손익 구조와 사회 혼란은 지금도 여러 전문가들 사이에서 설왕설래하는 지점이다.
이런 기본 골격 속에서 실사판 ‘인랑’은 몇 가지 다른 지점을 비튼다. 우선 실사판 ‘인랑’ 속 이윤희(한효주 분)는 영화 시작 중반 이후 정체가 공개된다. 사실 공개라기 보단 연출의 적절한 선택이다. 이미 원작에 대한 레퍼런스가 공개된 상황 속에서 이를 감추고 가는 것은 오히려 스토리 긴장감의 텐션이 떨어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윤희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임중경(강동원 분)은 이제 공안부와 섹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한 결정을 한다. 이 결정은 후에 특기대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 세력 암투 안에서 벌어진 모든 것을 위한 ‘특기대 내부의 진짜 특기대’ 인랑이 나서게 되는 이유를 부여한다.
영화 '인랑'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김 감독의 ‘인랑’은 이처럼 원작과 같지만 다른 약간의 지점을 더하며 실사화로의 당위성을 증명해 나간다. 특히나 원작 ‘인랑’의 지하수로는 실사화 영화 속에서 CG를 의심할 정도의 비주얼로 등장한다. 170억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답게 ‘지하수로’는 원작의 이미지를 거의 고스란히 살려냈다. ‘공간이 스토리를 전할 수 있다’는 명제를 설명하자면 김지운의 ‘인랑’ 속 지하수로가 정답에 가장 가까울 정도다.
두 번째는 ‘인랑’의 상징 ‘강화복’이다. 현대 SF장르 영화에서 ‘프로텍트 기어 액션’은 하나의 필수 요소로 불린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이언맨’이다. 김 감독은 원작 속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 벗어난 일본이 사용한 독일군 형식의 강화복 스타일을 아주 약간 변형시켰다. 눈에 띄게 드러난 변화는 없지만 김 감독은 이를 위해 강화복 디자인팀과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완성시켰다. 영화에선 초반과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전무후무한 ‘인랑’의 강화복 액션이 등장한다. ‘소리에도 스토리가 있다’고 믿는 김 감독의 스타일답게 현장음이 너무도 사실적이다. 이밖에 원작의 또 다른 포인트인 ‘빨간 망토’ 동화 차용도 실사 영화에 그대로 담겼다.
영화 '인랑'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물론 마지막 핵심인 결말은 다른 선택이다. 원작 자체가 갖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 특유의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선택은 ‘인랑’의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지점이다. 반면 김 감독은 정 반대의 선택을 했다. ‘개인이 집단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원작의 결말은 김 감독에 의해 변화를 맞는다. 영화 마지막 장진태(정우성)와 임중경의 대결에서 그 이유는 분명히 드러난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진태의 논리를 임중경은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김 감독의 ‘인랑’은 ‘사람의 탈을 쓴 늑대’의 얘기를 말하지만 그 늑대가 결국 다시 인간의 탈을 쓰는 것을 선택한다. 최소한 김지운의 ‘인랑’은 그렇게 희망이 존재하고 있단 점을 분명히 했다. 개봉은 오는 25일.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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