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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평화와 실리의 상징적 공간 개성공단
(10)김정일 파격제안으로 성사…중소기업 수혜
2018-09-22 13:12:59 2018-09-22 13:12:59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방북 시 합의한 사업 중 실현된 것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었다.
 
개성공단은 아산이 20여 년간 구상했던 실리적 공산권 경협론의 중요한 성과였다. 여러 악조건이 맞물려 우여곡절 속에서 현대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의 개발합의서 체결(2000년 8월22일) 후 4년 4개월 만인 2004년 12월15일 개성공단의 공장이 가동되어 제품 생산이 시작되었다. 분단국가 56년 만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개성공단은 단순교역이나 위탁가공 중심의 초보적 수준의 경협을 넘어 직접투자를 통해 남북 간에 물자와 자본뿐 아니라 인적교류를 확대했다. 예정 조성규모 총 2000만 평(공업단지 850만 평, 생활 및 관광구역 1150만 평) 중 공업단지 조성 세 단계(1단계 100만 평, 2단계 130만 평, 3단계 620만 평) 중 현재는 1단계에 있다.
 
남북철도개통일인 2007년 5월17일 오후 문산역을 출발한 남북철도가 도라산역을 지나 철책선을 통과, 개성공단 지역을 달리고 있다. 이날 시험운행된 남북열차는 반세기만에 성사된 역사적인 것으로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경의선과 동해선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진/뉴시스
 
남북정상회담 개최 후 현대아산은 중국 선전공단 등 경제특구 관련 자료를 북측에 제공했다. 공단의 위치로 처음에 북한은 신의주를, 아산은 서울과 가까운 남포·해주 등을 원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산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고려의 수도인 고도 개성과 판문점 일대를 파격적으로 제안했다. 남한에서 가장 가깝고 북한으로서는 개방하기 어려운 최전방 군사 요충지인 개성 지역을 남한 기업이 진출하는 특구로 설정한 것이다. 이는 군부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는 김정일만 결정할 수 있던 사안이었다. 김정일이 “개성이 6·25 전쟁 전에는 원래 남측 땅이었으니 남측에 돌려주는 셈 치고, 북측은 나름대로 외화벌이를 하면 된다”고 했듯이 개성공단이 북한에게도 큰 실리를 안겨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개성공단은 장기적 성장 전략을 모색하던 국내 제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었다. 소떼방북 당시 진보세력조차 대기업이 대북사업을 독점한다고 비판했고, 남북정상회담 성과의 최대수혜자는 현대라고 예측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경협의 수혜를 가장 먼저 받은 계층은 중소기업들이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임금과 지대의 상승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계기업들이 급증했다. 국내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익 양극화도 심해져 자본의 한계수익률에 직면한 중소기업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국내 고용사정 악화 → 내수시장 축소 → 생산 저하 → 실업 증가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이나 동남아 진출도 어려워졌고 이들 지역에 이미 진출했던 기업들마저 철수하는 상황이었다.
 
개성공단은 이러한 중소기업들에게 활로를 열어줬다. 특히 내수를 기반으로 한 중소기업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개성공단은 토지분양가나 세금에서 우대 조건이 뒤따랐고, 당시 임금 수준(57.5달러, 연간 상승률 5% 미만으로 제한)도 중국(100~200달러)이나 남한에 비하면 경쟁력이 높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의무교육을 11년간 받은 양질의 노동력도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개성은 서울에서 6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물류비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했다.
 
물론 개성공단은 중국의 선전 쑤저우 경제특구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중국이 개혁·개방 선언 후 외부 경협을 흡수하겠다는 적극적 자세로 경제특구를 마련한 것에 반해, 개성은 북한이 경제개발이나 시장경제 도입에 대한 공식적 전환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체제 위협을 우려한 북한은 개성공단 기업이 북한 현지에서의 자재 조달이나 상품 판매를 금지하여 남북이 함께하는 협력사업의 확산을 차단했다. 또 노동집약적 중소기업 위주에서 산업고도화를 꾀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저임금에 기초한 국제경쟁력이 떨어질 우려도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휴전선과 접해 있는 개성공단은 남북 상호 간에 실리적 이해관계를 아우르면서 대규모 인적·물적 왕래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긴장을 실질적으로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남북 관계가 요동치는 와중에서도 개성공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경우 123개 중소기업과 그와 연관된 하청기업의 직원과 가족 등 10만여 명의 생계가 달려 있고 북한 역시 외화획득을 위한 개방의 대내외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시기의 남침 통로가 이제는 매일 수백명 인원과 차량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제품을 생산하는 길이 되었다. 개성공단에서 생산하는 것은 상품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갈등을 녹이고 화해를 만들며 평화도 함께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경협을 통해 평화를 조성하고, 평화를 통해 경제적 실리를 극대화하는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 관계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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