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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포스코)‘빗장도시’ 논란, 포스코 vs. 비 포스코 갈등 심화
(4)소극적 병존의 시대(하)
2018-10-21 06:00:00 2018-10-21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포스코는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단순한 경제적 효용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전원 주택과 교육 단지를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포항이 명품 교육·연구 도시로서 성장하는 배경이다. 
 
포항이 교육 도시로 등장하는 것은 종업원들을 위한 주거 복지의 제공이라는 차원을 훨씬 능가한다. 물론 처음에 시작은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70년 11월에 ‘재단법인 제철장학회’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의 모태는 보험 회사로부터 받게 된 리베이트 6000만원이었다. 이를 활용하여 포스코는 포스코 교육재단 산하에 한국 최고 수준의 사립 유치원 2개, 초등학교 3개, 중·고등학교 3개 등 모두 8개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학생의 80%가 직원 자녀이며 학생들에 대한 장학 지원 사업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2018년 3월14일 현재 포스코교육재단은 포항 지역에 유치원 1개, 초등학교 2개, 중학교 1개, 고등학교 2개, 광양 지역에 유치원 1개, 초등학교 2개, 중학교 1개, 고등학교 2개, 인천 지역에 고등학교 1개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2월15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환경에너지부 직원이 나눔의 봉사 토요일을 맞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소재 사랑의 집에 연탄을 배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은 “교육은 천하의 공업(公業)이며 만인의 정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포스코 설립 과정에서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의 기치가 결합되었다. 교육보국은 제철보국과 서로 양립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포항은 단순한 교육 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 도시라는 점에 보다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의 상징은 1986년 12월에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으로 개교한 포항공대(POSTECH)와 1987년 3월에 설립된 산업과학기술연구소(현 포항산업과학기술원(RIST))이다. 이로서 포항 지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 대학, 연구소 사이의 삼각 체계가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포항공대나 포항산업과학기술원이 포항제철만을 위한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포항공대나 포항산업과학기술원은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의 결합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포항공대는 결코 좁은 의미의 철강 특성화 대학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미래 산업을 선도할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했다. 이는 포항공대 설립 당시 김호길 초대총장과 청암과의 의기투합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김 총장은 “만약 제가 포항에 온다고 하더라도 포철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철강은 언젠가는 사양화됩니다. 만약 제가 온다면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청암은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의 공간적 거점으로 포항을 지목하고 고수했다. 그는 대학 명칭과 연구소 명칭에 포항이라는 도시 이름을 고집했다. 1985년 포항공대 설립 당시 포항은 인구 25만명 이상 도시 가운데 대학이 없던 국내 유일의 도시였다. 요컨대 국내 최초 및 최고의 연구중심대학이 포항에 입지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학의 지방화와 과학기술 연구의 분산화를 통한 대학 간 연구 경쟁 유발은 물론 국가 전체의 대학 교육개혁 및 발전에도 이바지한 측면이 크다. 포스코에 의한 교육 기관 설립은 또한 교육 지방화 시대의 선두 주자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포스코는 창립 20주년이 되던 1988년부터 국내 과학 기술계의 숙원 사업이었던 방사광 가속기 신설을 추진해 마침내 1994년에 포항방사광가속기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이 시설이 서울이나 대전에 설치될 것을 바랐는데, 김 총장은 “돈을 내는 스폰서가 포철이고 건설 주체가 포항공대 교수로서 포항에 짓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훗날 이는 포항에서 한국 과학의 희망을 파종한 것으로 평가된다.
 
외국에서 포스코의 성공요인을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주거, 교육 및 연구 투자다. 일본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노와르 화리세 주한 벨기에 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포스코의 사원 주택 시설은 “북유럽의 어느 기업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며 만일 포항제철이 장의사까지도 경영한다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체의 복지제도를 완비한 기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도 낙후 지역인 포항에서 완비된 최고 수준의 주거 및 교육 시설에 주목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청암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서울에 가장 훌륭한 교육 시설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 개념을 타파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역발 국가 발전 및 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에 대한 청암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성기 전 포항공대 총장도 사석에서 포항공대는 향후 서울로 진출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지방 소재 대학으로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제공하는 복지후생에 대한 사원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서울대 사회과학연ㄱ구소가 지난 1991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포스코 사원들은 ‘상대적인 수혜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령 노동조합이 요구하기 전에 회사 측에서 ‘미리 밥상을 차려 놓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주거 생활이나 교육 환경에 대한 포스코 사원들의 만족도는 포항 전체 도시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초창기의 경우 청암은 포스코라는 기업을 중심으로 포항을 보았지, 포항이라는 도시를 통해 포스코를 구상한 것이 아니었다. 포스코는 처음부터 포항에 적극 동화하고 융화하려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현상이 바로 빗장도시(Gated City) 혹은 분단 도시(Devited City) 논쟁이다. 형산강을 기준으로 포항이 포스코와 비 포스코 지역으로 철저히 나뉘고, 포스코가 입지한 형산강 이남은 이른바 ‘강남’으로, 그리고 형산강 이북은 ‘강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포항 사람은 ‘자본이 그어 놓은 분단선’에 따라 이른바 ‘포철인과 포항인’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포스코 주택단지는 ‘특별사’ 혹은 ‘포철 왕국 안의 포철 황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포스코의 효율적 경영을 위해 소위 강남 지역은 크게 발전했지만, 포항 구도심에 사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크게 늘어난 결과였다. 이에 따라 포스코에 대한 지역 사회의 불만도 크게 증대했는데, 지역 사회에 대한 포스코의 기여 여부를 묻기 위해 1988년 8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9.5%가 불만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포스코와 인근 사원 주택단지는 일반 포항 사람들의 눈에 ‘그들만의 도시’로 보였다. 효자, 지곡, 인곡 단지에는 일반 포항주민의 입주가 금지되었고 포스코 부설 사립 초등학교는 특수 학군으로서 추첨 과정 없이 전원 포항제철중학교에 입학했다. 사립학교를 기반으로 포스코 종업원 자녀들의 학연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포스코 지역의 내부적 연줄망은 강화되었고 자신들만의 엘리트층 부촌을 형성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민주화 이후 처음 실시된 1988년 4월 제13대 총선 결과를 보면 포철 사원 단지에서는 당시 여당 후보가 압승을 거둔 가운데 야당은 선거운동도 제대로 못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분단 도시 혹은 빗장 도시의 형성이 결코 포스코가 포항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제하려는 발상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선 포스코는 태생적으로 향토 기업이라기보다 ‘국민 기업’이었다. 곧, 지역의 발전보다는 기업의 성장이 당장에는 더 절박한 과제였던 것이다. 또한 포스코라는 기업의 특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철강산업은 기본적으로 배후 도시의 지역 경제와 연관이 약한 편이다. 그리고 청암은 포항이 비록 산업 도시이긴 하지만, 전형적인 노동자 도시가 아니라 자본 집약적 내지 기술 집약적 중산층 도시 혹은 엘리트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현재의 포항’이 아니라 ‘미래의 포항’이 더 중요했다. 그만큼 기존의 포항시에 대한 직접적인 유기적 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포항이 전형적인 노동자 중심의 산업 도시가 아니었고 또 그렇게 만들 의사나 의지도 없었다는 점에서 포스코는 포항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데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점에서 포스코의 포항과 현대의 울산은 사뭇 대조적이다. 현대자동차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울산은 노동자 도시의 전형이다. 현대의 입장에서는 소비재 생산 기업으로서 배후 도시 울산과의 경제적 연관성도 높았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배와 통제도 상대적으로 절실했다. 그만큼 울산은 다분히 현재 지향적이었다. 울산은 지역 총생산의 측면에서 전국 최고 수준이지만 내생적인 혁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도시다. 연구 기관이나 연구 개발 인력 비율은 전국에서 꼴지 수준이다. 울산을 흔히 ‘돈 많은 머슴’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울산대학교와 포항공대의 지향점도 서로 대비된다. 전자의 경우가 당장 필요한 인력의 양성에 주력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기초과학에 바탕을 둔 미래형 첨단 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둔다. 요컨대 현대차가 있는 울산이 외연적인 도시라면 포철이 있는 포항은 내포적인 도시인 셈이다.
 
청암은 지역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간접적, 우회적으로만 관여하는 정도였다. 물론 포스코가 가동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부터 막강한 외지 엘리트층이 대거 유입되었고, 그들이 포항의 새로운 지배 엘리트로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1988년 8월에 20세 이상 포항 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 사람은 청암(31.%)이었다. 다음은 포항 시민(30.5%)이었고, 지역 국회의원은 14.9%였으며 포항시장은 불과 6.7%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 출신 신흥 외지 엘리트는 지역 사회에 대체로 무관심했고, 토착 엘리트는 외지 엘리트를 배제했다. 포항의 토착 엘리트 재생산 메커니즘은 동지상고, 포항고, 포항여고 등의 학맥, 그리고 포항제일교회, 복구교회, 중앙교회 등 3대 교회로 알려졌다. 그 결과, 이들은 포항 지역에서 일종의 정치적 상피(相避) 관계를 형성했다.(자료: 박태준과 지방, 기업, 도시 - 포철과 포항의 병존과 융합,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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