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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암기 만세!
2018-11-23 06:00:00 2018-11-23 06:00:00
독일 유학시절에는 주로 구두시험을 봤다. 교수와 학생이 1:1로 약속을 잡고 앉아서 한 사람은 묻고 한 사람은 답한다. 당연히 묻는 사람은 교수고 답하는 사람은 학생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좋은 성적을 받을 수는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몇 개의 질문에 답했는지에 따라 성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교수는 친절하게 그 질문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준비한 질문을 다 물어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질문에 답하는 최고의 비결은 바로 암기다. 누구나 차분하게 앉아서 종이에 풀어 가면 충분히 추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말도 잘 못하는데다가 암기도 잘하지 못해서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려웠다. 짜증이 났다. 어느 날 교수에게 푸념했다. "교수님, 제가 굳이 이곳 독일까지 유학을 온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무턱대고 외우게 하는 암기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이해 중심의 선진 교육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아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 학습은 암기일세. 책 속에 있는 것은 자네 것이 아니야.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 자네가 아는 거지. 이해는 못 해도 암기는 해야 해." 그리고 덧붙였다. "이해는 완전한 암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지."
 
교수님 말씀이 옳다. 생각해 보자. 중요한 것은 다 외운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삼삼은? 9! 팔구? 72!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까닭은 구구단을 암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I와 a boy 사이에는 am을 말하고 You와 a girl 사이에는 are를 말하는 데 아무런 고민이 없다. 암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해를 하면 암기가 쉬워지는 것처럼 반대로 암기를 통해 이해가 쉬워지는 경우도 있다. 역사를 공부할 때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는 암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는 1543년에 출판되었지만 1616년에야 금서가 되었다. 적어도 73년간은 금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천문학의 황금기다. 임오군란은 1882년, 갑오개혁은 1894년, 을미의병은 1896년이라는 숫자만 외우고 있어도 한국 근대사의 흐름이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암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하며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암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하기는 힘드니까 무턱대고 외우기라도 하자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암기도 잘한다. 왜냐하면 암기에도 창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한 번 보고 암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란 그야말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 그리는 한 편의 그림일 수도 있다.
 
암기에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생화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개의 핵산 염기와 20가지의 아미노산과 그리고 수십 개의 탄수화물 구조를 암기해야 한다. 이해할 게 하나도 없다. 무조건 외워야 한다. 이걸 암기하지 못하면 생화학 공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교수님은 스무 번 외우고 스무 번 잊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저절로 외워진다고 말이다. 스무 번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일곱 번은 외우고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한다. 무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암기가 필요할까? 인터넷 검색창만 두드려도 알 수 있는 것을 외워야 할까? 인공지능이 알아서 하면 될 걸 우리가 암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젠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하는 시대인데 암기가 필요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암기에 매진해야 한다. 
 
정확히 하자. 주입식 암기교육이 나쁜 것이지 암기가 나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해력을 측정하기 위한 문제가 좋은 문제인 것은 맞지만 단순 암기를 측정하는 문제가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순 암기를 못 하면 이해력을 요구하는 창의적인 문제도 못 푼다. "우리 아이는 이해력은 좋은데…. 암기를 요구하는 교육제도가 문제야."란 말을 많이 한다. 그런 생각이 바로 문제다. 암기 만세!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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