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KCGI의 발표에 대해 한진그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난 16일 국민연금이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행사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 나온 후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의 연장선이다. 다만, 그룹 내에서는 KCGI의 주장은 어느 정도 예고됐던 수순이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후 더 강도를 높인 제안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한진그룹은 외부 변호인단 지원 없이 자체 법무팀을 중심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KCGI측의 주장에 당장 답변할 의무는 없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KCGI에 우호적인 여론이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진그룹도 조만간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KCGI의 발표 내용이 조양호 회장을 정점으로 조현아·조원태·조현민 등 세 자녀들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경영권을 떼어내겠다는 의도가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경영진이 추천한 사내이사 1인, 일반주주들의 의견을 수렴해 KCGI가 추천한 사외이사 2인 및 외부 전문가 3인 등 총 6인으로 구성된 ‘지배구조위원회’ 설치가 대표적이다. 지주사 한진칼 이사회는 사내이사인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석태수 사장 등 3명, 사외이사인 이석우 법무법인 두레 변호사와 조현덕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종준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등 3인으로 구성됐다. (주)한진은 조양호 회장과 서용원 사장, 류경표 전무 등 3명의 사내이사와 한강현 변호사와 성용락 법무법인 고문 등 2명의 사회이사로 이뤄졌다. 두 회사의 사내이사는 자식 또는 최측근 전문경영인이며, 사외이사도 조양호 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양호 회장 지배체제를 굳건히 해왔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여 지배구조위원회가 설치된다면, 이 안에서 조양호 회장측 인사는 셀프추천한 자신 또는 측근 1명 뿐이다. KCGI 추천 사외이사보다 적다. 외부 전문가 3인이 있다고 하지만 최근 수년간 이어진 조양호 회장 일가에 대한 반감을 고려했을 때 우호적 인사를 모두 추대하기란 어렵다.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KCGI측 사외이사들의 강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임원추천위원회’ 도입 요구는 조양호 회장 일가 주변을 메우고 있는 전문경영인들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기업가치 제고방안의 일환으로 제안한 호텔 개발 사업도 한진그룹으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항공산업은 여행·레저산업과 함께 맞물려 성장해야 하며, 글로벌 항공사들도 여행업계와 공조해 상품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한진그룹은 항공기 제조·정비 사업을 통한 일관체제 구축과 함께 호텔사업을 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육성해왔기 때문에 시너지가 적다는 KCGI측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그룹은 호텔·레저사업이 오너 3세 경영승계가 이뤄질 경우 장녀인 조현아 전 KAL호텔네트워크 사장이 이어 받을 것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이런 주장이 나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 일가가 경영일선 후퇴라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이상, 한진그룹은 앞으로 KCGI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어떻게 해나갈지를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오너 일가에 대한 깊은 불만과 불신의 여론이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여론의 응원을 얻지 못하면 또 오너 일가의 경영권 집착으로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