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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피해자에 공갈죄 잣대 가혹"…태광공업 판결에 사법부 비난 목소리 커져
납품 중단에 지난달 31일 경영진 실형 선고…"국가 형벌권 과잉"
2019-02-26 16:59:23 2019-02-26 16:59:23
[뉴스토마토 강명연 기자] 완성차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거론되는 '전속거래'와 '직서열 생산구조'에 대해 사법부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 3차 협력업체에게 불공정 행위를 일삼으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해온 자동차산업 구조에 대한 고려 없이 검찰과 법원이 피해 업체들에게 기계적으로 공갈죄를 적용하고 유죄 판결로 실형을 선고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사법부가 '강자의 갑질 방지와 약자의 정당한 이익 보호'라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부도 위기의 하청업체 납품 중단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에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로 인해 부도 위기에 놓인 갑질 피해자들이 공갈범으로 처벌받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공권력 남용을 막을 입법을 신속히 추진하겠다"며 이 같이 밝혔다.
 
추 의원은 "2009년 이후 부도 위기에서 손실 보상이나 기업 인수를 요청했다가 공갈죄로 처벌받은 자동차 2차 협력업체 사례를 확인한 것만 16건"이라며 "70년 재벌 독식체계를 용인해온 우리 사회의 법체계가 '을'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라고 말했다.
 
26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부도 위기의 하청업체 납품 중단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에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강명연 기자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달 31일 현대차의 2차 협력사인 태광공업을 운영하던 손정우 대표와 그의 아버지 손영태 회장이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2차 항소심에서 각각 징역 4년, 2년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데 따른 것이다.
 
24년 간 현대차에 부품을 납품했던 태광공업은 1차 협력사인 서연이화의 단가 인하 압력을 견디다 못해 부품 공급이 어렵다고 알렸고, 이후 서연이화의 인수합병(M&A)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M&A 계약 후 금형(금속으로 만든 거푸집)을 넘기자마자 서연이화가 강압에 의한 계약이었다며 태광 경영진을 공갈죄로 검찰에 고소하면서 사건이 불거졌다. 앞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치러진 1심에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됐지만 2심은 오히려 "피해회사를 부도덕한 갑질 기업으로 비난한다"며 서연이화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가들 역시 전속 협력업체 납품 중단에 대한 공갈죄 적용의 문제를 지적했다. 자동차 산업의 수직적 생산구조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완성차 업체와 1차 협력사 이익을 위해 피해를 입은 2, 3차 협력사를 형사처벌로 옭아매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오후 열린 '하도급 전속거래구조에 있어 국가 형벌권 행사의 비대칭성'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사적 자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경제활동 영역에서 민사적 수단에 의한 분쟁해결 이전에 형벌 규율을 강제하는 것은 형벌권의 과도한 개입이라는 것이다. 또 2, 3차 협력사의 납품중단이나 공장설비 매각 등은 불공정 거래로 인한 피해 당사자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인 만큼 공갈죄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서 교수는 "자동차 산업이 어려움에 빠진 중요 원인 중 하나가 '하청업체 쥐어짜기'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검찰과 법원이 이를 심화시키는 '전속거래'와 '직서열 생산방식'을 묵인하고 방관하고 있다"며 "원청의 갑질에 대한 제도적 개선 없이 피해업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손실 보상이나 기업 인수협상을 꺼내든 데 대해 공갈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약자에 대한 압제이자 국가 형벌권의 과잉발동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손정우 대표의 아내 박보경씨는 기자회견에서 "1차 협력사의 오랜 단가 후려치기로 누적된 적자를 견디다 못해 납품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을 사법부가 공갈죄라고 옭아맸다. 이러한 어려움을 언론과 국회에 호소한 데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괴씸죄로 중형을 선고했다. 법이 약자의 호소를 듣고 억울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 사법부 체제에서 약자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며 법 제도를 하루빨리 개선해달라고 호소했다.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다름의 서보건 변호사는 "최소한 민사상 계약인 납품 중단 행위를 한 자에 대해 국가 공권력이 동원돼 감옥에 보낼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기업이 납품중단하는데 형사처벌로 감옥을 보내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며 국회에서 관련 입법 개선을 위해 힘써 달라고 강조했다.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하도급 전속거래 구조에 있어 국가형벌권 행사의 비대칭성'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사진/강명연 기자
 
강명연 기자 unsaid@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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