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이범종

smile@etomato.com

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이범종의 미리 크리스마스)소중한 날들이 흘러가기 전에

2023-07-28 19:42

조회수 : 3,586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선물 구입, 선물 포장, 몰려오는 가족, 시끄러운 저녁 식사, 관심 없는 이야기들.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중년 가장 헤수스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싫습니다. 올해도 이 귀찮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죠. 하지만 이번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별 다른 직업 없이 사는 동생에게 부모님이 땅을 물려주겠다잖아요.
 
심사가 꼬인 헤수스는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끝났다고 선언하곤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떠 보니, 1년 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버렸네요. 이후에도 다음날 아침은 이듬해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헤수스는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합니다.
 
영화 ‘낫 소 메리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실행 화면)
 
지난해 넷플릭스에 내걸린 마르크 알라스라키 감독의 '낫 소 메리 크리스마스'는 가까운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해가 지날수록 헤수스의 가족은 해체됩니다. 아들은 집 나가고 딸과의 관계도 소원해집니다. 하지만 헤수스는 지난 1년의 삶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동안 살아온 태도가 결과로 나타날 뿐이죠.
 
요정은 가족에 대한 무관심을 끝내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조건으로 이 마법을 끝냅니다. 하지만 헤수스가 다음날 일어나 보니, 아내는 이미 집을 나갔고 결혼반지도 돌려줍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헤수스는 이혼한 아내, 집 나간 아들, 멀어진 딸, 아버지와 형제를 집으로 부릅니다. 그동안 부정해온 아들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입니다. 아내를 가정주부가 아닌 꿈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고, 동생에게 땅을 주기로 한 부모님의 결정도 존중합니다.
 
다음날 아침. 크리스마스 이브가 돌아왔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셋던 헤수스가 젊어졌습니다. 자식들은 다시 꼬마가 되어 침대로 달려듭니다. 헤수스는 그동안 귀찮게 여겨왔던 이 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며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깁니다. 영화는 가족들의 즐거운 저녁 식사를 보여주며 헤수스의 독백으로 마무리됩니다.
 
"난 크리스마스를 한바탕 촌극이라 여겼다. 모두가 사랑과 환호로 가득 차 있다가, 다음날 되면 싹 잊는 것 같았으니까. 이번에 배운 게 있다면 크리마스 당일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많은 날들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무관심한 삶이 어떤 건지 조금 아는데, 누구한테도 권하고 싶지 않다. 크리스마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전에 내가 냉소적인 뻘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세상은 상냥한 마음으로 살아갈 만한 곳이다. 물론 다들 이미 알고 있겠지."
 
흔히 '루프물'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은 주인공이 같은 날을 반복해 살다가 어떤 계기로 사랑을 깨닫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가집니다. 빌 머리 주연 '사랑의 블랙홀'이 유명하지요.
 
저도 이런 영화 같은 상상을 가끔 해 봅니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저희 가족은 올해 처음으로 외할머니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눈물 흘릴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제가 중학생 때 키운 토끼 '토순이' 앞에 촛불 켜고 동생과 캐롤 불러준 날도 떠오릅니다. 그날 토순이는 자기 수염이 촛불에 타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들었지요. 그런 순간들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뒤에 이어지는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최근 모임에서 한 친구에게 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줬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한 권 씩 받은 '빅 이슈' 12월호와 크리스마스 카드였지요. 친구는 이날 헤어지면서 저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습니다. 사람이 북적이는 지하철역에서, 저도 "메리 크리스마스"로 화답했습니다. 덥고 습한 여름에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건,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 이범종

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 뉴스카페
  • email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