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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연

지역 언론사, 그리고 언론인

2017-02-19 23:40

조회수 :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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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었다. 부산에서 기자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본 날 밤, 부산에서 기자로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때는 동료에게 자살 사건을 얘기하며 분노했고, 부산 친구 얘기를 했었다. 소위 지역 메이저의 갑질이 젊은 기자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메이저 소속인 그 친구를 혼내주겠다며 큰소리쳤었다. 그렇게 분노한 날 밤에 친구가 전화한 용건은 서울이고 친구들과 모여 있으니 오라는 거였다. 반가움과 분노가 겹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초조하게 퇴근시간을 기다리다 일이 끝나자마자 모임장소로 달려갔다.
 
“부산에서 기자가 자살했다며!” 다짜고짜 친구를 다그쳤다. 자살한 기자는 법조기자였는데,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부산의 민영통신사 기자를 하다 그만둔 사람이 있었다. 법학과 출신이니 그도 법조기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건으로 회사를 그만둔 그 사람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친구에게 쏟아내자 부산에서 온 친구도 얘기를 꺼냈다.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어. 전혀 모르는 기자였는데, 나한테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해 온 거야.” 고인이 된 기자는 SNS에 자기 기사를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홍보했다고 했다.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던 기자가 졸지에 친구의 SNS 페친이 돼버렸다. 한 걸음 고인과 가까워졌고,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벽을 넘어보려 매 순간 분투했을 그가 그려졌다. 여전히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더 마음이 아팠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왜 그래?!” 친구에게 화풀이했다. 친구도 부조리를 인정했지만 본인은 그러지 않는다며,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일부분은 맞는 말이었다. 좋은 친구니까, 갑질하지 않으려 노력할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 사람의 죽음에 결백을 말하며 자유롭다고 얘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친구가 속한 소위 지역의 주류 언론은 철저히 그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해왔고, 다른 언론사 기자가 자신들의 리그에 들어오지 못하게 배제해왔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과점기업이 소규모 업체가 시장에 진출하기 못하게 각종 편법을 일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보다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행위다. 기존에 시장에 진출한 업체가 자유로운 경쟁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놓고 시장을 장악해버리는 걸 규제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존재하는데, 언론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황당한 일은 누가 견제해야 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교환학생 때 작은 도시의 삶을 처음 경험했고, 이후 지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소규모 지역사회의 소중함을 체험했었다. 평생 서울에서 살았기에 나한테 서울의 익명성은 익숙하고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나니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차갑고 장애로 가득한 곳인가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지역 공동체가 조금씩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거대한 서울 안에 있는 시민은 여전히 익명의 얼굴을 한 채 철저히 개인화돼있다. 메트로폴리탄의 불가피한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서울 집중은 깨져야 할 구체제다.
 
하지만 이번 부산 사건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지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줬다. 내 경험처럼 지역 공동체가 개인 소외를 막는 순기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오히려 기득권을 형성하고 스스로를 둘러치는 울타리를 만들어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에게 모든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치명적인 문제를 만들 유인도 크다는 거다. 이는 오랜 악습이기도 하지만, 기득권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안다. 끊임없이 감시해야 할 언론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앉아있으니....매일 힘들다며 투정하는 내 친구가 여기서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
 
학교다닐 때 언론윤리 수업을 듣고 토론을 하면서 내가 꿈꿔온 언론이라는 집단이 어떤 면에서 계륵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언론을 누가 감시해야하는가의 답이 시민이라는 답변은 어딘가 허무했다. 솔직히 황당했다. 누구보다 언론이 철저히 기득권화한 거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너희야말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지 않은가. 왜 여기에서 자유롭겠다며 시민이라는 단어를 가져오는지. 그럼에도 언론의 권력 견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기에, 어떤 경우에도 언론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현실에서 언론은 많은 기여를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시민의 감시도 있겠지만, 나는 언론인 개개인의 윤리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언론 생태계를 만들어온 언론인을 존경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정말, 언론인이 돼선 안 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 언론인이 돼서 미꾸라지처럼 흙탕물을 튀길 때, 언론계가 자정능력을 발휘할 정도의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집단이라고 믿는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손석희라는 사람이 지금 최고의 언론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언론의 자정능력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계륵이라는 말은 적확하지 않고 폄훼다. 그럼에도 시민, 기자 개인과 기자집단의 도덕성보다 더 단단하게 언론이 잘 하는지 감시하고 채찍질할 방안을 찾고 싶은 것도 맞다. 부산의 통신사 기자가 겪은 고통이 반복돼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언론집단에서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고 철저히 자성해야 한다. ‘나는 그러지 않았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기자가 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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