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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2화)개화(開化)의 상이한 길, 홍종우

“눈앞에 / 아무 지혜도 없다”

2017-04-1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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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維新)’이란 본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으나,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어우러진 독재정치의 역사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수구(守舊)’는 진정한 보수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의 탈을 쓰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타자를 종북·빨갱이로 몰아치는 고집불통의 기득권 세력을 가리키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구한말 인물들을 개화-수구의 대립구도로만 파악해 온 우리들의 인식도 굴절된 역사가 만들어낸 협소함일 수 있겠다.
 
홍종우가 프랑스로 간 까닭
‘김옥균의 암살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홍종우(1850~1913). 유신(維新)을 제창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근대화의 선각자’로 간주되는 개화파 김옥균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또한, 보부상들이 동원된 황국협회를 조직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는 점 때문에 수구파 인물로 인식되어 제대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던 그를 한 역사서가 새롭게 조명한 적이 있다(조재곤 지음,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2005년). 덕분에, 그 역시 개화를 지향했다는 것, 그러나 김옥균과는 다른 방식을 택했었다는 사실이 주목되었다.
 
홍종우는 갑신정변의 주역들 중 한 명인 개화당의 홍영식―흥선대원군의 집정 당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은 이때 자결하고 형 홍만식은 을사늑약 때 자결한다―과 같은 남양 홍씨 남양군파였으나 벌족인 이들과는 달리 몰락한 가문에서 가난하게 성장했다. 먼저 그에 대한 <만인보>의 소개를 보자.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법국 빠리 소르본느 대학에 가서
춘향전도 번역하고
르낭과도 친한 사이
보들레르 단골집 술 마시고
공부 잘하고 온 사람
그 공부 바로 내버리고
돌아오는 길
자객으로 바뀌어
일본에서 상하이까지 따라가
개화당 김옥균을 쏘아 죽여버리니
그 송장 보내어
효수케 하고
유유히 본국에 돌아온
자객 홍종우
 
그 공덕으로 좀벼슬 살다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맞서
황국협회를 만들어
보부상을 동원
독립협회 때려부수는 일에 앞장섰다
 
조선왕조의 최후를 반동으로 장식한 자
< … >
오늘도 이 땅 도처에
홍종우의 자식들로 놀아나니
 
역사는 역사 따위 등진 자에게도 살 데를 주나니
(‘홍종우’, 6권)
 
이 시가 속한 <만인보> 6권은 1988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니 홍종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기 훨씬 전이다. 그래서인지, 그를 수구반동세력으로 간주한 기존의 일반적인 평가를 공유하는 시인의 관점이 엿보인다. 시에서 한 가지 확인해 둘 정보는, 홍종우가 프랑스에 간 공식적 목적이―그의 여권에 설명된 바에 의하면―법을 공부하러 간 것은 맞지만, 소르본느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기메(Guimet)박물관에서 바라(C. Varat, 1843~1893)가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따라 한국에서 수집해 온 물품들을 분류하는 일을 하며 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이 생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을 번역했는데, <춘향전>(Printemps parfumé)은 공동작업을 한 프랑스인의 필명(J. H. Rosny)으로, <심청전>(Le Bois sec refleuri)은 그의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홍종우가 <심청전>의 서문으로 32페이지에 걸쳐 한국 역사를 소개한 것은 조국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자부심, 자신의 나라를 유럽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앞서, 홍종우는 프랑스로 갈 경비를 벌기 위해 1888년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사에서 촉탁 식자공으로 근무했다. 또한 자신이 그린 서화를 팔거나 강연도 했는데, 마침내 2년 뒤인 1890년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마르세이유를 거쳐 그해 12월 24일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당시 급진공화당 의원이던 클레망쏘(G. Clemenceau) 앞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일본 자유당 총수가 써 준 추천서와 한 선교사가 뮈텔(G. Mutel) 주교 앞으로 써 준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뮈텔 주교는 바로 그 직전 프랑스를 떠난 상태여서 불어를 전혀 하지 못하던 홍종우의 첫 소통은 일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와 일본어로 이뤄지게 되고, 며칠 후에는 그를 기메박물관에 근무하게 주선한 화가 레가미(F. Régamey, 1844~1907)와도 만나게 된다.
 
그가 만 40세의 나이에 완전히 낯선, 지구 저편의 나라로―게다가 2년간 일하며 준비해―떠났던 이유를 그의 친구가 된 레가미의 다음 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홍종우는 배움에 목말라한다. 매우 야망에 차서, 그는 자신의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할 목적으로 유럽 문명에 스며들기를 열망한다. 특히 프랑스 정치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몇 년 후 조선에 돌아가 일본의 현 상태를 가져 온 운동과 유사한 운동의 진두에 서기를 원한다.”(Félix Régamey, T'oung Pao, Vol. 5, 1894, p. 262) 즉, 그가 프랑스로 간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을 중국, 일본, 러시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전 세계로부터 조선을 고립시키는 장벽들을 철폐”하기 위해 근대화를 배우고자 함이었다(앞의 글).
 
같은 방향 다른 길, 홍종우와 김옥균
1893년 7월 프랑스를 떠난 홍종우는 귀국 전 일본에 도착했다가 병이 나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데, 12월에 이일직의 방문을 받게 된다. 민영소의 밀명을 받고 개화파의 암살을 위해 일본에 온 이일직은 이 계획이 고종의 뜻이라고 전해 홍종우의 동의를 얻는다.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접근해 세계와 동양의 정세, 조선의 현실 등을 논하고 프랑스 요리, 조선 요리를 그와 손님들에게 대접하며 신뢰를 쌓았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10년간 떠돌던 김옥균은 일본에게 배신당한 상태여서 홍종우가 상하이행을 권하자 리홍장을 만나 정치적 재기를 할 목적으로 그와 함께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84년 3월 28일 홍종우는 상하이 미국 조계 내 일본인이 경영하는 뚱허(동화)양행이라는 호텔에서 김옥균을 암살한다.
 
먹구름 몰려왔다
멸망하는 까닭은 너무 많아
정작 멸망하는 까닭이 없을 만했다
눈앞에
아무 지혜도 없다
어김없이
이런 시절에도 삶과 죽음 있다
 
개화당이여
조선 주자학이
실학에 의해
공리공론의 허학이 되고
개화당 개신 불교로
오백년 유학 파기
거기 젊은 혁명가 김옥균이 나타난다
 
그들의 혁명 삼일천하
너무나 즉흥이었다
낡은 것 치자고
왜놈을 믿었다
개화 일당 혹은 망명 혹은 죽음이었다
김옥균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십년 징역에 처형되고
어머니와 누이는 음독 자진하고
그의 아우 또한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충청도 옥천 관비로 끌려갔다
< … >
 
한번 대역죄인이 되면
심지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까지
미리부터 벼슬길 꽉 막아놓는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대역 무도의 고장은
고을마저 강등되어
천한 땅으로 내려앉는다
한 혁명가의 패배를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이 희생되는
이 모진 연좌에는
조상의 무덤까지 파내어
그 뼈 흩어버리기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고균 김옥균의 글씨 한 폭 쳐다보다가
그대더러
누가 혁명가라 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처음부터 왜놈의 볼모였던 근대 선각의 바람과 구름이었다
(‘김옥균’, 7권)
 
체포된 홍종우가 밝힌 암살의 이유는, 김옥균이 정변을 일으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고 국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 그리고 외국 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침입함으로써 조선·청나라·일본의 국제 관계에 큰 해를 끼쳤다는 것 등이다. 양화진에 도착해 능지처참된 김옥균의 시신에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쓰인 천이 함께 전시되는데, 김옥균의 ‘대역부도’함을 확신하고 나라를 위해 적을 죽였다고 믿은 홍종우의 신념에 대해서는 착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여러 개혁정책들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김옥균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존해 개혁을 꿈꾼 것이 과오였다면, 독립협회가 자신의 지휘 없이도 자율적·민주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는 만민공동회 민중들의 저력을 무시하고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 오류를 범했다면, 홍종우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놓친 세력관계를 보았고 자주적 개화운동을 지향했으되, 다른 한편으로는 근황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실현에 실패한 셈이다. 그가 고종 황제에게 '외국군대 철수'와 '방곡령 실시', '상·공업 육성책', '외국공사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11번이나 올렸다고 하나, 민중에 반(反)하는 황권, 외세에 이리저리 치이는 황권을 중심으로 무엇을 바꾸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한편, 김옥균 암살은 일본에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김옥균은 죽어서도 그의 ‘삼화주의(三和主義)’와 함께 한반도와 아시아의 지배를 위한 일본의 전략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이 바라본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김옥균 암살 후 여러 관직을 섭렵했던 홍종우는 1903년 제주목사로 밀려났다가 1905년 스스로 사직한 후 일본제국주의의 패권 속에 추락한 대한제국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의 족보에는 1913년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때까지의 생애 마지막 몇 년에 대한 정보는 불분명하다. 그가 프랑스까지 건너가 홀로 고독한 학습과 체험을 한 것은 때로 의미있게 발현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가 광무 2년(1898)에 평민 중심의 하원 개설 운동을 펼친 것은 독립협회가 귀족 중심의 상원 설립을 주장한 것과 대조된다. 독립협회의 외세의존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그가 프랑스 체류 당시 한복만을 고집했던 이유도 짐작할 만하다.
 
프랑스에 유학 온 최초의 한국인으로 주목을 받고, 뛰어난 지력과 독특한 차림새 등으로 눈길을 끌었던 홍종우에 대해 당시 프랑스 언론들은 여러 번 다루었다. 앞서 인용한 레가미의 글은 주간지인 르 몽드 일뤼스트레(Le Monde Illustré, 삽화로 본 세상)의 1894년 6월 24일자에도 실렸는데, 레가미가 제공한 홍종우의 모습과 그가 늘 간직하고 다녔다는 고종황제와 대원군의 초상화도 실려 있다. 레가미는 자신의 글에서 르 피가로(Le Figaro)의 보도도 전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신문은 ‘그날그날(Au jour le jour)이라는 코너에서 “모든 애국주의들이 감동시키는 자비롭고 고귀한 영혼들에게 호소하며 홍종우에 대해 ”자유당 즉 ‘개화도(改化道)’에 속하며 반동적인 당 즉 ‘고제도(古制道)’에 반대되는“ 인물이라 소개한다. 또한 ”그는 조선에 유럽의 풍습을 소개하려 분투하지만 생업이 없다“고 말하며 “누가 한국인을 원하는가?”라고 끝맺고 있다.
 
<만인보>의 시에 등장하는 르낭(E. Renan, 1823~1892, 작가·언어학자·철학자·종교사가)이나, 베이징 전권공사로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때 서울에 와 홍종우를 만난 적이 있는 코고르당(G. Cogordan, 1849~1904)과 홍종우의 만남도 레가미가 묘사하고 있으나, 백년이 훨씬 넘어 그 기록을 읽는 전(前) 프랑스 유학생의 입장에서는 홍종우의 고독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르낭은 그래도 처음 만난 홍종우에게 “용기, 용기”라고 그를 격려했지만, 당시 외무부장관이 된 코고르당과의 만남은 비애감을 불러일으킨다. 홍종우는 낯선 곳에서 아는 이를 만난 반가움이 너무 커 코고르당의 발밑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그의 손에 입맞춤을 하였지만(그러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프랑스는 당시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을 완전히 무시해야 했으므로 이 외교관을 더 귀찮게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레가미는 쓰고 있다(레가미, 앞의 글, 264-265쪽).
 
1894년6월24일 프랑스 르몽드 일뤼스트레에 실린 홍종우 관련 기사와 그의 초상화.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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