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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향

전쟁은 절대악일까?

하타케야마 소의 <대논쟁! 철학배틀> 中

2017-04-2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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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종교적 갈등 등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 현재에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여전하다.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점점 첨예해지고 사드 배치, 북한의 핵 실험 등으로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간의 갈등은 정치가 해결하고 정치의 갈등은 전쟁이 해결한다는 말처럼 전쟁은 종식될 수 없는 것일까?


<대논쟁! 철학배틀>은 윤리와 정치경제 과목을 가르치는 일본의 유명 강사 하타케야마 소가 지은 책으로써 한 주제를 놓고 소크라테스부터 공자까지 사상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짜여졌다. 5장에서 전쟁은 절대악일까?’라는 주제에 루소와 칸트 VS 홉스와 벤담이 대화를 나눈다.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홉스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의 자연에서는 인간이 서로 싸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생명을 지키는 자기보존의 권리를 갖고 태어나며 자기보존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최고의 자연권(천부인권. 생명, 재산 그리고 자유가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루소 자기보존의 수단으로써 인간이 계약에 의해 사회를 형성 했다는 견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기보존만이 원초적인 행동의 원리일까? 오늘날까지 인간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자기보존 이외에 연민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인간의 자기보존은 타자의 희생을 최소화하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홉스 - 아무것도 없는 방에 나와 자네 둘만 30일 동안 갇혀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곳에 콜라 한 병이 눈에 띄었다면 어떻게 될까? 각자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콜라를 서로 뺏는 투쟁 상태에 놓일 것이다. 이 투쟁이 과연 악일까? 이 투쟁 상태야말로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루소 서로 나누어 마시면 되지 않을까?


벤담 밀폐된 곳에 만약 백 명, 천 명의 인간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 소수의 희생은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인간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사이의 투쟁과 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칸트 사람의 수가 적든 많든 상관없이 무조건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의무의 윤리. 이성에 의해 도출되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도덕이 있다. 그것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윤리의 달성, 즉 의무의 윤리다.


홉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난다.


칸트 그렇다고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지 않나?


홉스 그래서 인간은 새로운 공포를 설정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공포를 지닌 지배자에게 자기보존의 권리를 맡김으로써 개인끼리의 투쟁 상태를 피할 수 있다. 인류 공통의 적이 내려와 모든 국가들이 힘을 모아 싸우는 상황이 된다면 국가끼리는 전쟁을 멈추겠지.


칸트 공포에 의한 평화라니 말도 안 된다. 쇄국 정책을 취하자(1795<영구평화론>).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것을 완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모든 국가가 서로 무기를 버리고 하나의 국제 공동체를 만들자. 그 국제 공동체에서 전쟁의 종결을 영구히 약속하면 된다.


소크라테스 전쟁을 절대악으로 볼지 말지의 문제는 일단 젖혀두고라도 이번 라운드에서 어느 정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 같기는 하군. 다음에 또 만나세.


이 책에서 토론은 사회자인 소크라테스의 정리로 마무리 되는데 어떤 정답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철학자들의 발언을 듣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당신은 누구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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