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권익도

넬부터 시규어로스까지…한여름 무더위 날린 ‘2017 밸리록’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펼친 3일간의 대장정…장르 확대로 모호해진 록페 정체성 '과제'

2017-08-02 10:15

조회수 : 1,692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국내 최대 규모의 록 페스티벌 ‘2017 지산 밸리록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밸리록)’이 삼일간의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은 밸리록은 그동안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레드핫칠리페퍼스 등 최정상급 밴드들을 섭외하며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로 성장해왔다. 28일부터 3일간 경기도 이천 지산리조트에서 열린 올해 축제 현장에도 넬, 칵스 등 국내를 대표하는 밴드부터 시규어로스, 고릴라즈, 로드, 레이니 등 해외 최정상급 밴드들이 무대에 올랐고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관객들은 그들의 ‘록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페스티벌의 ‘정체성’ 논란은 올해 최대의 난제로 꼽혔다.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과 힙합, 재즈 등의 뮤지션들이 메인과 서브무대를 잠식하면서 예년에 비해 록 뮤지션들이 큰 무대에 설 기회가 상대적 줄어들었고 ‘록페’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운 주최 측의 의도가 다소 불명확해 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난해부터 공연장 곳곳에 설치된 설치미술 역시 관객들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뮤직 앤드 아츠’라는 타이틀의 병렬 구조를 설명 하기엔 후자의 비중이 미약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 아재춤, 현대무용식 퍼포먼스…빗속에서 예열된 페스티벌


28일 개막한 밸리록은 시작부터 페스티벌 최대의 난관인 ‘비’와 조우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 탓인지 개막 초반에는 다소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이 짙게 다가왔다. 우비를 입은 관객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무대 앞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셔틀버스나 숙박 부스를 제외하곤 먹거리나 음료를 구매하려는 줄도 짧았다. 




하지만 주요 출연자들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이내 반전됐다. 메인무대 ‘더 브이(THE V)’에서 다리를 흐느적 거리는 잔나비 보컬 최정훈의 ‘아재춤’에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흙으로 뒤덮인 잔디밭에서 너도나도 그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고 현장은 순식간에 ‘춤파티’로 이어졌다. 이어 ‘알록달록’, ‘정글’, ‘몽키 호텔’ 등 흥겨운 곡이 계속되며 페스티벌의 흥을 돋구었다.




잔나비가 끌어올린 흥은 국내 하드 록 밴드 ABTB가 이어 받았다. 메인무대 근처의 캠핑장을 등지고 있던 ‘튠업’ 스테이지에서 이들은 정통 록의 ‘진수’를 보여줬다. 헤비메탈과 같은 강한 사운드를 주로 연주하면서도 장르적 실험을 시도한 음악들도 선보였다. 특히 공연 후반부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정통 록사운드로 재해석한 곡을 들려주자 관객들은 웃으면서 함성을 마구 표출했다.




이어서는 세계적인 밴드들이 바톤을 이어 받아 ‘록의 열기’에 불을 지폈다. 지난 2014년 재결성한 영국 출신의 혼성 밴드 슬로우다이브는 ‘슈게이징의 대가’ 답게 그 장르의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기타가 생성해 내는 잡음과 보컬 레이첼 고스웰의 오묘한 목소리, 그 소리들을 뒷받침하는 탬버린과 드럼 박자들로 뒤범벅된 음악은 마침 비가 그쳐 지산을 자욱히 뒤덮은 안개의 몽환적인 풍경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뉴질랜드 출신의 여성싱어송라이터 로드는 허스키한 보이스로 현대무용을 하는 듯한 춤사위를 보이며 독특한 무대를 선보였다. 그는 ‘테니스 코트’를 시작으로 ‘마그넷츠’, ‘홈메이드 다이너마이트’ 등을 차례로 들려주며 시작부터 끝까지 “한국 관객들이 너무나 아름답다”를 연신 외쳤고 관객들은 일제히 엄지를 추켜 들거나 노래에 맞춰 핸드폰 불빛을 좌우로 흔들며 환호했다. 


◇ 북유럽의 서정으로 여름밤 무더위를 적시다


수많은 해외 밴드들이 무대에 올랐지만 올해 밸리록을 가장 빛낸 건 북유럽(노르딕) 출신의 뮤지션들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는 노르딕 출신 답게 이들은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 광활한 대지를 떠올리는 자연의 언어들을 노래했다.




분위기의 대전환은 아이슬란드 출신 싱어송라이터 아우스게일의 입에서 시작됐다. ‘헤드 인 더 스노우’, ‘언더니스 잇’ 등의 신비로운 음악들로 그는 관객들을 여름이면 백야가, 겨울이면 오로라가 펼쳐지는 아이슬란드로 초대했다. 무대 뒤 전광판에는 그의 음악과 마치 거울처럼 닮아있는 자연의 세계들이 펼쳐졌다. 대표곡 ‘드리밍’과 ‘킹 앤 크로스’가 나올 때는 파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가 그어진 아이슬란드 국기를 들고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 관객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아우스게일이 몽환적인 여정으로 관객들을 이끌었다면 덴마크의 루카스 그레이엄은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가사로 관객들을 서정에 젖게 했다. ‘세븐 이어스’로 7살과 11살, 20살로 이어지는 덴마크의 한 청년의 성장과정을 들려주는가 하면 ‘해피 홈’에서는 앞으로의 평생을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감정을 드러낸다. 상처를 받고 끊임없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한 청년의 솔직한 노랫말들이 그와는 상반되는, 경쾌하면서도 밝은 멜로디에 실려 오자 감격에 젖어 눈시울을 붉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두 팀이 일으킨 북유럽의 서정은 아이슬란드의 국보급 밴드 시규어로스에서 절정에 달했다. 공연시작 20분 전부터 무대 주변은 아이슬란드의 서늘한 공기 향이 느껴졌다.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분할된 영상이 펼쳐짐과 동시에 트롤이 동굴에서 뿜어내는 듯한 소리가 배경음으로 흘렀다. 


이윽고 공연시간인 10시가 되자마자 그들은 빛을 내뿜는 여러 개의 기둥 사이에서 ‘오베르’를 열창하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컬 욘시의 팔세토 창법(두성을 사용하는, 보통의 고성부보다 더 높은 소리를 내는 기법)과 활로 켜는 기타 선율이 폭발적인 드러밍, 베이스 연주와 맞물리면서 순식간에 관객들은 우주 속을 거니는 듯한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에메랄드빛 은하수를 풀어놓은 듯한 레이져가 쏘아올려지는가 하면, 빙하와 화산지형의 흑백 대비가 돋보이는 지역이 영상 속에 흐르기도 했다. 마지막 즈음 ‘페스티벌’에서 ‘크베이퀴르’, ‘포플라기드’ 세 곡이 몰아칠 땐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압도적이고 기이한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공연 중간 멘트도 한번 않고 드럼 스틱을 던지며 전광판에 아이슬란드어 ‘탁(Takk)’이 뜬 건 그들의 공연 마무리 시간이던 밤 11시30분. 1시간 반 동안 멘트도 한번 않고 연주한 그들은 온 몸으로 울부짖으며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 임을 여실히 증명해 냈다.




◇ 세계적 밴드 사이서 ‘보석’처럼 돋보인 넬, 칵스


국내를 대표하는 밴드들의 활약들도 ‘보석’처럼 빛났다. 최근 신곡 ‘부서진’을 내고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넬의 무대에는 공연 시작 전부터 발 디딜 틈 없는 관객들로 가득찼다. 




‘디컴포즈’로 포문을 연 그들은 ‘습관적 아이러니’, ‘잇츠미’ 등 최근 발매한 ‘C’ 앨범부터 ‘유령의 노래’, ‘도쿄’ 등 과거의 여러 앨범 수록곡을 훑어 가는 셋리스트로 관객들과 호흡했다. 


“이번에는 저녁이랑 잘 어울릴 만한 곡을 한 곡 할께요. 노래를 아는 분이 계시면 같이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컬 김종완의 멘트와 함께 ‘기억을 걷는 시간’의 전주가 흐르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을 했다.


공연 중간에는 타블로가 등장해 에픽하이의 6집 수록곡 ‘아모르 파티’를 함께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 올리기도 했다. 이후 ‘판타지’, ‘믿어선 안될 말’ 등의 강하고 신나는 곡들이 폭죽과 물대포와 맞물리며 그린파파스 전체를 아름다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냈다. 




넬과 함께 공연장을 뒤집어 놓은 또 다른 국내 팀은 칵스였다. ‘오버 앤 오버’, ‘캠프파이어’ 등 록킹한 곡이 쏟아져 나오자 관객들은 시작부터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동그란 원형 형태의 슬램존을 형성하는가 하면, 록 스피릿에 젖어 기차놀이를 하는 장관을 펼치기도 했다. 


“기차 놀이, 누가 잘해? 나는 전생에 기차였다! 알아서들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보컬 이현송이 부추기자 관객들은 마치 해적단이이라도 된 마냥, 더 뜨겁고 격렬하게 포효했다. 


“쉴 시간이 없어. 멘트하면 한 곡이 줄어드니까 안해” ‘12시’, ‘AC/DC’, ‘오리엔탈 걸’, ‘점프 투 더 라이트’, ‘트러블 메이커’ 등이 연달아 계속 이어졌고 일부 관객들은 칵스 표시의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관객들은 큰 원을 그리고 어깨동무를 한 뒤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를 부르기도 했다. 


◇ 록페란 타이틀이 남긴 ‘정체성’이란 과제


행사를 주관하는 CJ E&M은 지난해부터 록에서 EDM, 힙합을 아우르는 장르적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올해도 딘, 지코 등 힙합 뮤지션과 DJ, 자라섬 재즈 뮤지션 등을 무대에 세우는 실험을 강행했다. 록 다음에 ‘뮤직’이란 이름을 넣고 다양한 음악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지만 일부 팬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그나마 설 자리도 없던 록 음악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쏟아낸다.




실제로 3일 연속 페스티벌에 참가한다는 직장인 김모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가 큰 무대에 서길 바라는 욕심은 팬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첫째날 넬 공연을 보러 왔는데 메인 무대에서 더 좋은 음향으로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고 말했다.


한 인디 음반 레이블 관계자는 “최근 힙합이나 EDM에 비해 록 음악의 인기가 시들해 지면서 이런 페스티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며 “이곳에서라도 정통 록음악이 설 자리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올해 밸리록은 음악적 장르를 넘어 미술과 패션의 영역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돋보였다. 여성 픽토그램을 형상화한 홍승혜 작가의 ‘빅토리아’, 목구조물에 홀로그램 필름을 덧입힌 윤사비 작가의 ‘프리즘’, 7m 높이로 솟아오른 권용주의 ‘폭포’ 등이 공연장이나 이동하는 길목 중간 중간 위치해 관객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을 두고 ‘밸리록’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규정짓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작품들이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작품을 만져보거나 인증샷을 남기는 것 뿐이었다. ‘뮤직 앤 아츠’ 속에 담긴 병렬 접속사를 설명하기에 후자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정체성의 모호함이 관객들의 규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지산보다 지리적 이점도 있고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출연한 다른 페스티벌에 관객들이 몰렸고 결국 지산의 관객 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줬을 거란 설명이다. 실제로 주최 측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3일간의 종합 관객 수는 총 6만명이었고 이는 예년의 평균 수준인 9만명에 한참 못미치는 규모였다.

  • 권익도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