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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대학입시의 문턱에 선 딸에게, 그리고 세상의 고3에게
2018-12-17 08:00:00 2018-12-17 08:00:00
“시험 치르느라 수고했어. 힘들었지? 어서 들어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막 치르고 혼자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시험 결과는 묻지 않고 ‘안아만 주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불안한 마음에 대뜸 시험을 망쳤냐고 물을 뻔했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렀고 단지 몸이 너무 힘들어서 울음이 났다고 했다. 사정이 있어 남들처럼 시험장 앞에서 대기하다 데려오지 못해 미안했다. 
 
내년에 만19세가 되는 아이에게는 수년을, 아니 한국 기준으로는 태어나서부터 전 인생을 통틀어 준비했다고 할 이번 수능이 어른이 되는 첫 관문이었을 것이다. 수능 이후 연일 들끓은 ‘불수능’, ‘마그마수능’ 뉴스를 접하며 나는 아이가 그 첫 관문을 ‘잘’ 넘어서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마음을 졸였다. 살아보면 어떻게든 문을 넘어 어른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부모 마음이란 게 자식이 언제나 ‘잘’ 넘어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와는 달리 아이는 관문을 ‘잘’ 넘을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현재로서는 일단 최선을 다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노력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었다. 1년 더 시간을 들여 다시 그 문 앞에 서기는 싫다고 했다. 인생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힘들어 하며 현실에 순응하면 앞으로 다가올 더 어려운 관문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냐고 한 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어차피 내가 대신 통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한들 어린 시절 나처럼 알아먹을 리가 없을 테니까. 
 
수능을 끝내고 며칠 사이에, 아이는 양쪽 귓불의 다섯 군데에 피어싱을 했고 긴 머리카락을 탈색하고 블루그레이색으로 물들였다. 나에게는 피어싱을 통보하였고, 탈색에 대해서는 잘 하는 미용실이 어디인지를 문의하였을 뿐이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대학입시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또 자기주도의 고교생활을 하게끔 배려했지만 아이의 행동에서 입시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대학생이 된 다음에 탈색이나 피어싱을 해도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하며, 어른이 되는 것은 단순히 마음대로 멋을 부릴 수 있다는 게 아니며 나이만 든다고 무조건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참았어야 하는데 참지 못하고 잔소리까지 더하고 말았다. 아이의 대답을 듣고 나니 내가 한 말이 하지 않아도 될 잔소리였음이 분명해졌다. 대학생이 되는 순간 곧 바로 취업에 신경을 써야 할 텐데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느냐고 아이는 말했다. 인턴생활을 하거나 면접을 보러 다닐 때 탈색하고 갈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반 친구들도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학 생활의 낭만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보다 지금 취업과 사회생활의 경쟁이 더 치열하다”며 자신이 나보다는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이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대학입시 말고도 더 힘든 관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한편으론 안도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안타까웠다. 대학생이 되어도, 취업경쟁의 압박으로 내가 아이의 나이에 누린 젊음의 낭만, 학구적인 열정, 나름의 기준으로 진지했던 방황 등의 특권을 누리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에 아팠다.
 
내 아이의 상황은 그 나이 평균치의 모습일까. 아마도 대학입시의 문턱에 선 다수의 고등학생들에게서 내 아이와 비슷한 정도의 스트레스와 상황인식을 목격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더 큰 스트레스와 더 절박한 상황인식에 직면한 청소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관문을 ‘잘’ 넘을 생각이 없고 어떻게든 ‘꼭’ 넘어서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며칠 전 보육원에서 멘토링 봉사를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교 학생인 보육원생의 멘토가 되어 학업이나 생활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고, 보육원생이 고3이 되자 대학자료나 대학입시 자료를 알아봐 주었다고 했다. 그는 여느 고3 학생처럼, 정확하게는 훨씬 더 대학입시에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의 성공 기준에는 취업에 유리한 대학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포함되지 않았다. 최우선하는 조건은 신입생들에게 기숙사 입소 혜택을 주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3인 보육원생에게 대학입시는 ‘자립’의 사활적 관문이었다. 
 
현행 보육원에서 만18세가 된 보육원생은 퇴소하여야 하는데, 이때 자립정착금을 받지만 현실적으로 방 한 칸을 구하기도 어려운 금액(서울은 500만원)이다. 만24세가 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자립시설이 있지만 전체 퇴소자의 7%만 그 시설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예의 그 보육원생이 적은 자립정착금을 받아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대학입시에 실패하면 서울에서 20살이 안 된 청소년이 500만원을 들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부모의 보호를 받는 내 아이가 상대적으로 행복한 처지에 놓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내 아이나 그 아이나 20살이 되기 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냉혹한 현실인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느 사이에 대학은 젊음의 해방구가 아니었고, 사회와 다름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바뀌었거나 바뀌고 있었다. 내가 누린 젊음의 특권에는 물론 나름의 불편과 고충이 있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대학이라는 젊음의 해방구에서 누린 특권임을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내 아이와 내 아이 세대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준 데에 나와 내 세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많이 잘못했다는 판단이 들지는 않아서 곤혹스럽다. 
 
당장은 아이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방치’하고 틈나는 대로 많이 안아줄 생각이다. 다만 ‘방치’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예의 그 청소년은 누가 안아주어야 하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그 아이가 기숙사 있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기를 기원하지만, 그 기원이 어쩐지 부끄럽기 그지없는 겨울이다. 다소 무책임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이와 아이 세대를 응원하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윤진 한국CSR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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