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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앙드레김'과 '최순실'
2019-11-21 06:00:00 2019-11-23 12:40:22
"본명 아니잖아요. 본명을 대세요."
 
"김봉남, 64세입니다."
 
1999년 8월24일 오전 국회에서 오간 대화다. 본명을 대라고 다그친 사람은 15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었던 목요상 당시 신한국당 의원. 답변자는 앙드레김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앙드레김은 이른바 고위층 사모님들의 '옷로비 사건'에 휘말려 법사위 청문회 중 증인으로 출석했다. 
 
앙드레김(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은 생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관리에 엄격했다. 언제나 즐겨 입었던 상하 순백의 의상은 그런 그를 잘 상징했다. 그랬기에, '옷 로비 연루'는 그에게 더욱 참을 수 없는 불결한 사건이었다. 후에 무고함이 확인됐지만 그것은 뒤의 일일 뿐이다.
 
순백의 의상보다 그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드러낸 것은 '앙드레김'이라는 이름이다. 1935년생인 그는 한영고를 졸업한 뒤 만 27세 되던 1962년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한국 최초의 남자 패션디자이너다. 앙드레김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당시 그가 찍힌 사진을 보면 여느 신사와 같은 복장이었다. '순백의 의상'이 상징으로 자리잡기 이전이다. 
 
앙드레김이 자신의 본명을 밝히자 국민적 관심의 본말은 금세 전도됐다. '옷로비 사건'은 오간 데 없고 '앙드레김=김봉남'이라는 뉴스가 장안을 한동안 휩쓸었다. 오죽하면 '옷로비 사건' 수사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앙드레김=김봉남' 하나뿐이라는 평이 나왔으랴. 
 
그러나 그것은 '천하의 앙드레김' 본명이 고작 '김봉남'이냐는 비아냥이 아니었다. 앙드레김이 그때까지 쌓아 온 세계적 패션디자이너,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명성과 국민적 친근함에 대한 또다른 사회적 확인이었다. 앙드레김 역시 그를 희화해 김봉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에서, 자신을 '김봉남' 보다는 '앙드레김'이라고 쓴 기자들에게 고맙다는 전화 정도를 하는 것이 다였다고 한다. 
 
본명이 무엇이었든, 시민들이 한때 뭐라고 부르든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 패션의 대명사 '앙드레김'이었다. 그렇게 '본명 김봉남'씨는 2010년 8월 폐렴과 대장암으로 별세 할 때까지 만 48년간을 앙드레김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남아 있는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게도 그의 본명은 흐려졌을지라도 앙드레김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서원씨가 93개 언론사에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최순실이 아닌 최서원으로 보도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고 한다. 최씨를 대리하고 있는 변호인단은, 또 한번 최서원이라는 이름 대신 최순실이라고 보도하는 언론사가 있다면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제기할 기세다.
 
국민 개개인의 이름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의 상징적 대상이다. 법원도 개명을 허가할 때 가장 비중을 두고 보는 것이 개인의 주관적 의사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달라고 하면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예의다. 최씨의 주장은 이유 있다.
 
다만, 최씨가 이름을 문제 삼으니 이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최씨는 1956년 6월 출생했다. 본명은 최필녀,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출생한지 23년만인 1979년에 개명해 얻은 이름이다. 최씨는 그렇게 만 35년 동안 '최순실'로 살았다. 지금의 최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때는 국정농단 2년 전인 2014년이다. 
 
최씨가 최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유는, 최근 언론사에게 보낸 내용증명에 잘 나와 있다. 최씨의 대리를 맡은 변호사는 “언론사들은 촌스러운 동네 아줌마 같은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등 박근혜 대통령 뒤에 숨어 국정농단을 했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악의적으로 ‘최순실’로 보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운 동네 아줌마 같다'는 지적은 개인이 주장하는 개명의 이유로는 적절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연혁적으로 보면, 최서원 이전의 최순실이라는 이름도 1970년대에는 유행에 맞는 세련된 이름이었다. 최씨 자신도 개명 이후 35년간 최순실로 살지 않았던가. 어느모로 보나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촌스러운 동네 아줌마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최씨나 최씨 대리인은 아름다운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이땅의 모든 최순실'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다.
 
'언론사들이 최씨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최씨의 부정적 이미지는 본인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국민적, 사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본명 김봉남'씨를 앙드레김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정농단의 비선실세라는 오욕은 한낱 이름에 따라 벗을 수 있거나 책임이 크고 작아질 문제가 아니다. 최서원씨는 지금 이름을 핑계로 '최순실이라는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최기철 사회부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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