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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코로나, 희미한 연대, DJ 예지를 듣다
2020-04-01 00:00:00 2020-04-01 00: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03년부터 해마다 유망한 신인들을 선정해 왔는데 대체로 적중했다. 매년 말 음악 비평가들과 업계 종사자들의 투표로 '사운드 오브'를 산출한다. 첫 해 50센트를 시작으로 아델(2008년)과 샘 스미스(2014년) 등이 이 리스트를 거쳐 세계적인 뮤지션이 됐다.
 
2018년 BBC의 이 리스트에 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동그란 테안경이 마스코트인 DJ 예지(YAEJI·이예지·28). BBC는 당시 '전례가 없던 음악'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그를 올해 '그래미 4관왕' 빌리 아일리시와 같은 줄에 올렸다. 미국 음악전문지 피치포크 역시 '오토튠을 바른 웅얼대는 한국어가 뉴욕 현지 프로듀서들에게 인기 있다'고 그를 소개했다. 카네기 멜론대의 개념미술 전공자며 취미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이력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예지가 첫 믹스테잎 'WHAT WE DREW 우리가 그려왔던'을 오는 2일 전 세계 동시 발표한다. 싱글 음원이 난무하는 시대에 13곡을 꾹꾹 눌러 한 앨범에 담았다. CD와 LP는 현재 주요 음반 사이트에서 예약을 받고 있다.
 
예지 새 믹스테잎 'WHAT WE DREW 우리가 그려왔던'. 사진/강앤뮤직
 
미리 들어본 새 앨범은 전작만큼 다양한 소리 실험이 돋보인다. 하우스 리듬을 굵직한 기본 줄기로 삼되, 덥 재즈나 G-펑크(G-funk), 힙합 요소를 씨줄 날줄처럼 엮었다. 10대 시절 주로 들었다는 한국 인디록과 일렉트로니카, 2000년대 초반의 알앤비 영향도 아른거린다. 
 
신보는 신스음이 넘실대는 첫 곡 'MY IMAGINATION:상상'부터 꿈결 같은 상상으로 나아간다. 몽환적인 전자음의 파고, 먹먹한 오토튠의 목소리. 허밍과 함께 엇박으로 하우스 리듬('WHAT WE DREW: 우리가 그려왔던')이 울리면서부턴 해저에서 유영하듯 몽롱해진다. 하우스 리듬의 세기는 곧 유령 같은 색소폰 선율의 덥 재즈로('These Days :요즘'), 일어와 영어가 교차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폭풍 같은 랩핑('Free Interlude')으로 번진다. 무국적 무장르의 초 경계적 음악이다.
 
ASMR처럼 웅얼거리던 기존 예지의 창법이 비교적 높은 피치로 변한 것은 신작의 특이점이다. 하지만 귀곡성처럼 시린 이 음성에 얹히는 한국어 가사는 아이러니다. 이질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연대와 교감을 연상시키는 언어들. 앨범 후반부 비치된 곡 'THE TH1NG'에서는 아예 '하나가 되거나/ 혹은 하나의 같은 것'이 될 거라는 다짐으로 나아간다. 
 
31일 음반유통사 강앤뮤직에 따르면 실제로 이 앨범은 '공동체 의식'처럼 제작됐다. 조명 디자인부터 스타일링,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나피 니나, 빅토리아 신, 쉬원 등 뉴욕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친밀한 동료들과 협업했다. 타이틀곡 'WHAT WE DREW: 우리가 그려왔던' 뮤직비디오에는 한국의 따스한 가족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1993년 뉴욕 퀸즈 플러싱에서 태어나 미국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란 그는 고립감의 고통, 이후 자신을 치유시킨 '열린 마음', '공동체적 가치'를 이 앨범에 녹여냈다. 
 
코로나19 여파로 연대가 희미해지는 오늘날 이보다 더한 연대는 없다. 다국적 언어가 교차하는 이 무경계 음악에 오늘날 불가항력의 경계마저 무너지고 사라진다. 이어폰을 타고 불어온 따뜻한 온기가 파란구 모형에 빨간 뿔이 솟은 흉칙한 코로나 분자 모형을 지워버린다.
 
DJ 예지. 사진/프라이빗커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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