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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식의 K-국방 ③)독자 지휘권 확보, 부하 사랑 실천 '채명신 리더십'

박정희에 정면으로 반대 의견 개진…부하 희생 줄이고 전과 거둬

2023-07-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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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의 회의실을 ‘채명신 장군실’로 개관,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너럴스(The Generals)>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위대한 장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부제를 붙였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미국 육군 장군 30여명이 보여준 전쟁 지휘 리더십을 언론인 토머스 릭스가 분석했습니다.
 
저자는 맥아더를 "그의 사명감은 (국가보다는) 오로지 자신에 대한 사명감이며 리더십은 퉁명스럽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이었다"고 낮게 평가했죠. 아이젠하워에 대해선 "유머 감각과 성실성, 정직함 같은 인간적 자질을 발휘해 모든 사람과 잘 협조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조지 마셜은 2차 대전 뒤 국무장관으로서 서유럽 부흥을 위해 '마셜 플랜'을 추진해서 유명한데요. 그는 육군 참모총장 때 전투 성과가 시원찮은 장군들을 가차 없이 해임해 군대 기강을 세웠다고 저자는 긍정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이념 프리즘을 들이대지 않고 비판적, 실용적으로 군인 리더십을 평가했습니다. 필자는 비슷한 관점에서 채명신(1926~2013) 장군을 조사했습니다.  국가 이익을 어떻게 고민했나? 업무 성과는? 동료와 부하를 사랑했나? 등을 살펴봤습니다. 전기 <불후의 명장 채명신>,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와 같은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채명신은 베트남 전쟁 때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라고 '단순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는 단순하지 않아요. 채명신은 1960년대 상황에서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투부대 파병을 추진할 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채명신은 대통령 앞에서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냅니다.
 
"베트콩들의 또 다른 강점은 월맹 대통령 호찌민이 반프랑스 독립투쟁의 국민적 영웅이며 애국자라는 인식이 남북 월남 거의 모든 사람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점입니다. 쉽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전쟁입니다."
 
냉전 이념이 당시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베트남 실상을 알더라도 내놓고 입에 담기 어려울 때였죠. 그는 소신파였습니다.
 
어쨌든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합니다. 채명신을 주월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채명신은 대통령을 다시 찾아갑니다. "군인으로서 결정을 따르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파월 국군은 미군 지휘를 받으면 안 됩니다.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만약 미군이 한국군을 지휘하면 힘든 곳, 어려운 국면에 한국군을 투입할 게 뻔합니다. 희생자가 많이 생깁니다."
 
대통령은 곤란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국군 작전지휘권도 미군이 쥐고 있는데 하물며 베트남에 간 한국군이 미군 지휘를 받지 않겠다니…. 대통령은 지휘권을 넘기겠다고 주한 미국대사한테 이미 말해둔 상태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에게 의중을 밝혀 두십시오.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십시오."
 
베트남에 도착한 한국군은 전투에 바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현지 적응 훈련을 하고 진지를 만든다고 시간을 보냅니다. 미군은 당연한 일처럼 한국군을 지휘하려고 했습니다. 한국군 참모들이 버티면서 미군과 논쟁을 벌였죠. 사이공에서 한미 합동회의가 열립니다. 채명신이 발언권을 신청했고 한국군 독자 지휘권 당위성을 힘주어 설명했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 미군 사령관이 동의하기에 이릅니다.
 
채명신은 작전 방법도 개발했습니다. 미군은 적군 출몰 지역에 폭탄을 퍼부은 다음에 헬리콥터로 병력을 투입하고 수색해 들어가는 기동전을 폈습니다. 채명신은 중대 단위로 진을 치고 지키다가 적군이 쳐들어오면 공격하는, 중대 전술기지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몸을 드러내고 공격하는 것보다 몸을 참호에 숨기고 방어하는 편이 희생을 줄이기 쉽죠.
 
"월남전은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 전쟁이 아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그렇다고 군인정신을 일탈하면서 비겁하게 소극적으로 (하자는 건) 아니다. 기발한 전술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채명신이 참모들에게 하던 말입니다. 본국 정부도 미국 눈치를 보는 어려운 여건에서 채명신은 미군을 설득해 작전지휘권을 확보했습니다. 작전 전술도 개발했습니다. 자주적으로 소신을 발휘해, 부하 희생을 줄이고 전과를 거둔 거죠. 이것이 국가 이익이었습니다.
 
채명신은 '경제 외교관'을 자처했습니다. 한국 기업이 미군 용역을 따도록 지원합니다. 한국 업체가 미군 예산으로 한국군에 물품을 납품하도록 손을 썼습니다. 전역 장병이 미국 기업에 취업하도록 알선했죠. 한국 경제는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습니다. 1967~1970년 베트남에서 들어온 달러가 외환 보유고 40%를 차지할 정도였죠. 채명신이 막후 역할을 했습니다.
 
채명신은 5·16 쿠데타 주역이지만, 유신헌법 추진을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3성 장군으로 예편당합니다. 외국 대사와 외국 기관 연구생으로 돌다가 63세에 국내로 돌아옵니다. 2013년에 세상을 뜨는데요. 서울 국립현충원에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1평 사병 묘역을 희망해 묻힙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숨진 부하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유언대로였죠.
 
<제너럴스>에 등장하는 장군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며 물자가 풍부한 미군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국방 예산과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 선진국 수준이죠. 1960년대 한국은 세계 최빈국에 속했습니다. 채명신은 어려운 여건에서 국가 이익을 고민하고 업무 성과를 냈으며 부하를 사랑했습니다. <제너럴스> 장군들보다 훌륭했습니다.
 
 ■필자 소개 / 박창식 / 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위기관리와 소통, 말과 글로 행복해지는 기술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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