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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김행 "여성=돌봄, 성별에 따른 직업 구분 사라져야"

"성범죄의 본질은 구조적·정치적 폭력"

2015-10-2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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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청와대 대변인 출신 공공기관장이라는 이유로 취임 초 많은 구설에 시달렸다. ‘낙하산’, ‘전문성’ 논란부터 시작해 여성단체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취임 2주년을 앞두고 있다. 그에게는 공공기관장으로서 철학이 생겼고, 그간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는 그동안 성범죄 피해여성, 가정폭력 피해여성, 성매매 여성, 다문화 여성, 가출 청소년, 북한 이탈주민 등 소외받는 사람들을 만나며, 양성평등교육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김 원장이 생각하는 공공기관장의 첫째 덕목은 애국심이다. ‘일한 대가로 국민의 혈세를 받는 공직자에게 국가와 국민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김 원장의 답은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전문성 역시 중요한 가치지만 애국심보다는 후순위다.
 
서울 불광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실에서 김 원장을 만났다. 여성과 약자, 인권과 정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눈 김 원장은 ‘임기 중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도 ‘직원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싶다’고 답했다.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청와대 대변인 출신 공공기관장이라는 이유로 취임 초 많은 구설에 시달렸다. ‘낙하산’, ‘전문성’ 논란부터 시작해 여성단체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덧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에 취임한 지 2년이 돼간다. 그간의 소회를 간단히 말해달라.
 
지난 2년간 성범죄 피해여성, 가정폭력 피해여성, 성매매 여성, 다문화 여성, 가출 청소년, 북 이탈주민 등 복지의 사각지내에 놓인 여성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다. 인생은 4s라고 하더라. 20대에는 공부(study)를 하고, 30대부턴 성공(success)을 추구하고, 45세가 넘어가면 의미 있는 일(significance)을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55세부턴 희생(sacrifice)이다. 지금 내 나이가 네 번째 ‘s’에 해당하는데, 이 일을 하면서 지난 2년간 만났던 분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소명의식이 생겼다. 달리 말하면 공적 이익을 위해 내 삶을 헌신하는 것이다.
 
-소외된 여성들을 이야기했는데, 안타깝게도 사각지대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부익부 빈익빈을 이야기할 때 경제적 관점에서 주로 다루는데, 그 결과물은 가정의 해체다. 얼마 전 포항에서 성매매 여성이 모텔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있었다. 나중에 집을 찾아가보니 초등학교 2학년 된 여성의 딸을 외할아버지가 키우고 있더라.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성매매 여성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매매로 버는 돈이 아니면 자신과 손녀가 살아갈 수 없기에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였다고 한다. 실제로 주민등록상 손녀의 아버지(엄마의 전 남편)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는 국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문제는 나중이다. 이 어린 손녀를 외할아버지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언제까지 키울 수 있겠냐. 결국 경제적 결핍이 가정 해체로,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은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들어보니 빈곤으로 인한 가정의 해체도 문제지만, 정책이나 구조적 문제도 심각해 보인다.
 
친부나 가족으로부터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기관이 있다. 그런데 이곳의 여성들 중 상당수가 친부한테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자활훈련이라고 해봐야 전문적인 직업교육이 아니고, 나가면 집 말고는 마땅히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면 친부나 계부로부터 다시 성폭행을 당한다. 성매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자립 가능한 환경이나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단기적 격리 후 다시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성범죄의 경우에는 가해자 관점의 접근도 필요할 것 같다. 왜 발생한다고 보는지.
 
성범죄는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폭력이다. 군대를 예로 들면 계급정년을 앞둔 여군들이 성범죄에 많이 노출된다. 정해진 시기에 진급을 못 하면 군복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인사권을 쥔 상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비롯한 온갖 횡포를 당한다. 사회에선 장애인이나 어린이, 노인들이 약자다. 오히려 젊고 당당한 여성이 성폭행을 안 당한다는 통계도 있다. 김길태, 조두순도 본인들이 사회적 약자였기에 더 약자인 어린이를 노렸던 것이다. 결국 성범죄는 자신보다 열악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권력을 과시하거나 사회적 분노를 표출하는 반인권적인 폭거다.
 
-양평원 이야기다. 일각에선 양성평등이란 단어가 여성우대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양성평등의 출발은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이다. 남성도 고정관념의 피해자다. 우리나라처럼 남자가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받는 나라가 어디 있나. 결혼은 남녀가 동등한 인격체로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자의 수입이 줄어들면 여자 중심으로 가계를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게 양성평등이다. 당연히 남성도 육아나 가사에 참여해야 하고.
 
-여성고용할당제도 그렇고 정책적 측면에서는 여성에 집중되는 면이 없지 않다.
 
여성 직업으로 불리는 돌봄·요양 분야에서는 임금이 최저임금을 밑도는 경우가 많다. 여성은 가계의 보조소득자라는 인식이 강해 ‘여성=돌봄=저임금’이라는 공식이 굳어진 것이다. 성별에 따른 직업의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 기존 남성의 일로 구분되던 직종에서 여성을 채용해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보육·요양·간호 등의 직종에 남성들을 채용해야 전반적인 임금 수준도 올라간다. 업무만 따지더라도 성인남성을 씻기거나 챙겨야 하는 요양 등 직종에서는 남성의 손길이 절실하다. 다만 아직까지는 지위 결정권이 남성에 집중돼 여성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일부에선 여성의 사회진출이 남성의 취업을 가로막는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여성의 취업으로 가계소득이 올라가고, 가계의 늘어난 소비가 내수경기를 이끄는 선순환구조가 정착된다면 사회 전반적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베, 메갈리아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특정 성에 대한 혐오발언이 난무한다. 여혐, 남혐이란 단어가 등장할 만큼 갈등도 심하고. 이런 상황을 해소할 방안이 있을지.
 
개인적으로 초등학교 과목에 인권이 있었으면 한다. 대학도 인권학과를 따로 설치한 곳은 없더라. 혐오나 증오는 결국 인권의식의 문제다. ‘필라델피아’라는 영화가 있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직장해서 해고당한 변호사가 법정투쟁을 하는 내용이다. 거기에서 주인공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법을 사랑하는 이유는 법이 늘 그렇진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 정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법이라는 단어와 정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우리가 과연 정의와 법, 인권과 공존, 존중과 배려, 이런 단어들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게 교육을 하는가. 나 역시 자책감이 든다. 이제 대한민국도 소프트파워를 키워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 질문이다. 임기가 1년 정도 남았는데 총선 출마설을 비롯해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정해둔 다음 목적지가 있나.
 
나는 내가 청와대 대변인이 될지 몰랐고, 공공기관장이 될지도 몰랐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는 안 되더라. 사실 내가 내년에도 양평원장으로 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제 내 인생이 ‘sacrifice’ 단계라는 점이다. 어떤 자리든 공적인 헌신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남은 임기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요즘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공직기강 확립이다. 왜 공공기관 직원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 이런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저명인사들을 초빙해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도 진행한다. 더불어 내가 기관에서 나가더라도 기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도 규정을 정비하고 있다. 또 하나는 11월 22일 손기정 마라톤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싶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많은 여성들이 참가하는데 이렇게 훌륭한 여성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김지영 기자 jiyeong8506@etomato.com
 
김행 한국양성평등진흥원장이 지난 22일 서울 불광동 양평원 대회의실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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