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마지막 여정, 헬싱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암각화로!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30)
2024-06-24 06:00:00 2024-06-24 09:34:06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유지 헬싱키에서 생각하는 핀란드-러시아사
 
드디어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목표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일부다.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해 헬싱키에서 버스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먼저 알타에서 오슬로-스톡홀름을 경유해 헬싱키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예약했었는데 기체 결함으로 출발이 지연됐다. 몇 시간 기다린 끝에 같은 항공사의 다른 비행기로 트롬쇠를 경유해 오슬로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승객들의 수하물이 도착하지 않았다. 덕분에 문의하느라 지치고 한참 동안 공항을 헤매야 했는데, 다행히 한 베테랑 직원의 도움으로 자정 가까이 돼서야 공항 한 구석의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방치돼 있던 내 배낭을 찾을 수 있었다! 짐 소동으로 오슬로 공항에서 몇 시간을 허비하느라 항공편도 두 번 바뀌어 결국 다음날 아침 다른 항공사의 헬싱키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알타에서 트롬쇠로 이동 중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노르웨이의 롯순. (사진=박성현)
 
변수로 인해 핀란드 도착이 늦어졌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버스를 타기 전까지 내게는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헬싱키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거리에 위치한 아스투반살미 암채화를 방문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여건상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 대신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돼 있는 수오멘린나 요새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 요새는 독특한 군사건축기념물로 1991년에 등재됐다. 답사기간 내내 따라다니던 비는 여기서도 어김없이 내리고 있다. 시내 중심부에 도착하니 원로원광장을 둘러싼 헬싱키 대성당과 정부궁전(옛 원로원 건물), 헬싱키대학 본관이 보인다. 광장에는 러시아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공국이었던 1852년에 완공돼 1917년 핀란드의 독립 전까지 ‘성 니콜라스 교회’로 불렸다. 이 성당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니라 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의 헬싱키 교구인 교회다.
 
원로원광장에 서 있는 헬싱키 대성당은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사진=박성현)
 
광장 건너편 골목길을 죽 걸어가니 재래시장이 있는 카우파토리, 즉 마켓광장이 나온다. 마켓광장 한가운데에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꼭대기에 러시아 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가 장식돼 있다. 이 기념비는 1833년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의 헬싱키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함께 방문한 황제의 이름 대신 황후의 이름을 새긴 것에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념비 뒤쪽으로 길 건너에 보이는 건물은 스웨덴 대사관이어서 마치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핀란드 땅은 수백 년간 스웨덴의 통치를 받았고 1809년부터는 러시아의 자치 대공국으로 다시 백여 년 동안 지배당했다. 스웨덴의 핀란드 통치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불분명하지만 13세기 후반 문헌자료가 있는 걸 보면 그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헬싱키의 남부항구 옆 재래시장이 있는 마켓광장(카우파토리). 멀리에 정교회 건물인 우스펜스키 대성당이 보인다. (사진=박성현)
 
수오멘린나 요새는 스웨덴이 헬싱키 근교의 6개 섬에 걸쳐 건설한 성형(星形) 요새이다. 1747년 요새 건설을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했지만 완공은 18세기 말에 가서야 이뤄졌다. 이 요새 건설의 배경에는 해양권을 둘러싼 스웨덴과 러시아의 각축이 있다. 발트해 진출을 꿈꾼 표트르 1세 치하의 루스 차르국(1721년부터는 러시아 제국)은 스웨덴과 대북방전쟁(1700~1721)을 벌였고 스웨덴 영토의 일부를 갖게 된다. 1744년 러시아에 추가로 땅을 할양한 스웨덴은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헬싱키 근처의 군도에 요새를 건설한 것이다. 요새는 1808년 이후 러시아의 소유가 됐고 1917년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백군과 적군의 내전을 겪게 되자 적군 포로의 수용소로 사용된다. 건설 당시 스웨덴어 ‘스베아보리’로 불렸던 요새는 독립 이후인 1918년부터 핀란드어 이름 ‘수오멘린나’(‘핀란드의 성’)로 바뀌었다. 현재 수오멘린나에는 800명가량이 거주하며 약 400명이 이 요새에서 일한다고 한다.
 
수오멘린나 요새의 경관. (사진=박성현)
 
수오멘린나 요새의 드라이독(Dry dock)은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됐으며 현재 선박수리소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박성현)
 
요새가 있는 이소무스타사리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분홍색 건물이 있다. 러시아 통치 시절이던 1868~1870년에 지어진 부두 병영이다. 이 막사는 군인 25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옆에 지나가는 그룹투어 안내자의 설명을 슬쩍 듣다 보니 역사적 관계 때문인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느껴진다. 백여 년을 지배당하고 20세기에는 겨울전쟁과 계속전쟁까지 치렀으니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수백 년간 통치한 스웨덴에 대해선 부정적 언급이 없어 의아하다. 그 후손인 스웨덴계 주민들이 핀란드 사회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일까?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공용어라는 것도 두 나라의 길고 복잡한 관계를 보여 준다. 
 
수오멘린나 요새의 이소무스타사리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분홍색 건물이 러시아 통치 시절에 지어진 부두 막사이다. (사진=박성현)
 
수오멘린나 요새 내부에 있는 터널들 중 하나. (사진=박성현)
 
에르미타주로 간 오네가호수의 암각화
 
헬싱키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는 경로는 원활했고 시간 지체도 없었다. 도착 당일에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입장권을 구할 수 없어 다음날 표를 예매하고 하루 더 머물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된 오네가 암각화 바위를 공개 관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오네가 암각화 전시 외에 다른 제한 사항이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박물관에 도착해 문의하니 암각화를 일반 공개하지 않은지 오래됐다고 한다. 암각화를 보려면 미리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보제로 박물관에서 찰림바레 암각화를 보지 못한 실패를 여기서 다시 겪는단 말인가! 담당자를 붙잡고 사정한 끝에 상급자의 허락을 받아 단 몇 분간의 특별 관람이 주어졌다. 
 
새벽 2시경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들어가는 발리마 국경 통과 지점에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하는 버스. (사진=박성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사진=박성현)
 
1935년 에르미타주 박물관 측은 오네가호 암각화의 일부를 폭파해 박물관으로 가져왔다(본 연재 1회 참고). 공개되지 않는 전시실 내에서 본 바위는 오네가호수 페리노스 III 지점에서 떼어내 온 것이다. 의례 중인지 춤을 추는 듯한 사람, 사냥하는 사람, 사슴과 엘크, 고니와 다른 물새, 배와 배에 탄 사람들, 원 모양에 두 개의 선이 뻗어 나와 곡선의 손잡이 형태를 띠거나, 역삼각형에 나뭇가지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긴 막대 또는 지팡이 형상 등 오네가호수의 페리노스에서 보았던 독특한 이미지가 친숙하다. 수수께끼 같은 기묘한 형상들은 종종 태양과 달의 기호로 해석돼 왔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오네가 암각화만의 특징이다(본 연재 5회 참고). 일찍 옮겨져 보관돼 왔기 때문인지 바위의 그림이 선명하다. 관람을 5분밖에 허락받지 못했지만, 고향을 떠나 먼 박물관으로 온 이 바위의 그림을 보니 물결치던 호숫가 석양빛에 신비롭게 빛나던 오네가 암각화가 떠오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바위 외에도 에르미타주의 소장품 보관소에 다른 바위조각들이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1935년 오네가호수의 페리노스 지점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중인 암각화의 일부.(사진=박성현)
 
1935년 오네가호수의 페리노스 지점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중인 암각화의 일부.(사진=박성현)
 
박물관 입장권을 구하느라 하루 더 머문 덕분에 운하와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현지인들이 줄여서 부르는 이름은 삐쩨르―의 매력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북방 진출을 추진한 표트르 1세에 의해 1703년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에는 네바강과 강의 지류를 이용한 수많은 수로와 다리들이 놓여 있다. 삐쩨르는 카스피해와 발트해 유역을 연결하는 볼가-발트해 수로의 기점이다. 이 수로는 러시아 북서부의 운하와 강, 호수를 잇는 시스템인데, 삐쩨르를 중심으로 아래쪽으로는 볼가강의 리빈스크 저수지, 위쪽으로는 라도가호를 거쳐 오네가호에 이른다. 볼가-발트해 항로는 다시 오네가호수와 백해를 연결하는 백해-발트해 운하로 이어지게 된다. 네바강이 중요한 수로 역할을 하다 보니 매일 수많은 선박이 강을 지나갈 수 있도록 늦은 밤마다 도개교들이 들어올려져 열리는데, 이 광경이 장관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도시의 교통량이 가장 적은 새벽 1시에서 5시 사이 매일 열리는 도개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이자 명물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리스도 부활 성당(또는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 왼쪽)과 그 옆의 그리보예도프 운하. (사진=박성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로 중 하나인 폰탄카강과 판텔레이모놉스키 다리. (사진=박성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인 도개교는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매일 늦은 밤마다 위로 열린다. (사진=박성현)
 
페노스칸디아 암각화를 생각하다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났다. 러시아 북서부 카렐리야공화국의 오네가호수와 백해의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답사하면서 페노스칸디아 암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의 바위그림은 무엇보다도 북극 해양문화의 반영이 두드러진다. 스키를 타고 육지에서 순록과 엘크를 사냥할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고래를 사냥하는 신석기인의 생활이 엿보이고, 의례 또는 제의행위와 연관된 의식세계를 짐작하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선사예술가들이 자연 지형과 바위의 미세 부조, 균열을 활용해 그림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바위의 표면은 때때로 그림에 대해 자연의 작은 풍경과 같은 배경이 된다. 마지막으로, 빙하가 남긴 지역의 암각화를 관찰하는 일은 기후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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