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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중동 국부펀드의 존재감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미래 산업으로 눈을 돌린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 주요 산유국들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기술·인프라·금융 분야로 투자 영역을 넓히며 시장 판도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과거 단순한 재정 투자자에 머물렀던 이들은 이제 '글로벌 자본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하며 세계 자본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IB토마토>는 중동 국부펀드의 투자 확대가 국내 사모펀드(PEF)와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짚고 향후 자본 유입 가능성과 대응 전략을 모색해본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중동 국부펀드가 K-콘텐츠 확산에 힘입어 국내 스타트업에 투자를 확대하려는 가운데 직접 중동으로 향하는 국내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선 사우디와 UAE를 비롯한 중동국들이 최근 몇 년간 에너지, 인공지능(AI), 지속가능산업 등 미래 전략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면서 한국의 벤처·스타트업도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핑크빛 전망이 나오지만, 기대만큼 투자금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전언이다. 이는 그동안 해외 출자를 통해 자금을 집행하면서도 정작 국내 산업 발전은 뒷전이라는 불만이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세계 국부펀드(SWF)와 공적연기금 규모를 집계하는 SWFI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국부펀드 10개 가운데 중동의 국부펀드는 4개로 집계됐다. ADIA(UAE), KIA(쿠웨이트), PIF(사우디), QIA(카타르)가 중동 소속으로, 전체 상위 10위 자산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중동 국가 가운데 자본시장 개방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사우디와 UAE다. 코트라(KOTRA)가 최근 발간한 ‘사우디아라비아 투자환경 가이드’에 따르면, 사우디는 ‘비전 2030(Vision 2030)’을 통해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문화·콘텐츠·스포츠 등 신성장 산업 육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공투자펀드(PIF)가 핵심 투자 축으로 작동하며, 해외 자본과의 합작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UAE 역시 ADIA, 무바달라(Mubadala) 등 대형 국부펀드를 앞세워 해외 콘텐츠·기술 기업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금융 및 외국인투자 규제 완화로 국제 자본이 들어오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면서다.
중동 국부펀드, 전 세계적으로 '미래산업 투자' 확대
해당 국부펀드들의 관심사는 미래먹거리 산업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나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거대 기술기업)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래사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면, 중동 국부펀드는 기관투자자(LP)로서의 자본력과 벤처캐피탈(VC) 투자를 통해 성장산업의 지분을 선점해 나가는 것이다.
중동 국부펀드의 영향력은 지난 5월 사우디에서 열린 '사우디-미국 투자 포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행사에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루스 포랏 구글 회장 겸 최고투자담당자, 앤디 재시 아마존 CEO, 벤처 캐피털인 앤드리슨 호로위츠의 벤 호로위츠, 샘 올트먼 오픈 AI 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리사 수 AMD CEO,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CEO 등 굵직한 글로벌 기업 수장들이 총출동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흘간 사우디, 카타르, UAE를 방문하는 중동 순방 일정을 소화하면서 세일즈에 나섰고, 엔비디아는 PIF가 출자한 스타트업 휴메인(Humain)에 최신 GB300 블랙웰 칩을 대량 판매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주목을 받는 등 성과가 뒤따랐다. 앞서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PIF와 400억달러(약 53조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하면서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도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기대와 달리 미미한 국내 투자…직접 돈줄 찾아 나서
한국 정부도 기업 총수들과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동을 순방하는 등 적극적인 세일즈에 나섰지만, 의외로 투자받은 곳은 많지 않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지난 2023년 PIF와 GIC(싱가포르투자청)로부터의 약 1조2000억원(약 9억6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이후 굵직한 소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VIG파트너스가 UAE 무바달라와 컨소시엄을 꾸려 카카오모빌리티를 인수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는 등 실패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오히려 국내 기업들이 오일머니 투자를 받기 위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중동으로 향하는 분위기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처음으로 중동 사업 진출을 위한 글로벌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짜고 중동으로 향하는 기업들을 추렸다. 중동에 진출하는 국내 스타트업은 리밸리온, 메디사피엔스, 스페이스워 등 AI·바이오·콘텐츠·스마트시티 등 4대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서류심사를 통해 112개사로 좁혀졌고, 사우디 현지 관계자가 방한해 대면평가를 진행해 최종 29개사가 선정됐다.
이번 달 정부가 주관한 '한국 투자설명회'에서도 사우디 비전 2030 프로젝트와 연계한 국내 기업의 투자처 확보가 주된 이슈였다. 해당 자리엔 사우디투자부(MISA), 국부펀드(PIF), 사우디펀드(JADA), 사우디국립과학기술연구원(KACST) 등이 참석했고, 참가 기업들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력을 소개하며 현지 투자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VC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에 "현지에선 해외에 자금만 조달하고 자국의 산업 발전과 연계되지 않은 투자에 대해선 부정적인 기류가 깔려있다"며 "기술 이전에 대한 약속이나 현지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하지 않고서는 투자 유치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VC도 중동 진출…출자 확보 '목적'
VC 업계서는 중동 자본시장 투자가 늘어나는 분위기다. IMM인베스트먼트를 비롯해 쇼룩파트너스, LB인베스트먼트 등은 펀드 결성을 통해 중동 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현지 기업에 대한 투자가 주된 목적이지만, 주요 LP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해 향후 출자처를 확보하는 게 목적이기도 하다.
쇼룩파트너스는 가장 앞서 중동에 특화된 VC라는 강점으로 관련 업계 주목을 받고 있다. 중동 국부펀드인 무바달라를 비롯해 10개 이상의 국부펀드 자금을 받은 국내 최대 규모의 중동 VC다. 공동창업자 마무드 아디와 함께 UAE 아부다비에 쇼룩파트너스를 설립, 중동·북아프리카·파키스탄 지역의 스타트업을 발굴해 초기 단계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쇼룩파트너스의 운용자산(AUM) 규모는 약 7000억원으로, 사우디 핀테크 유니콘 ‘타마라’, UAE 물류 스타트업 ‘트로커’, UAE 스마트팜 기업 ‘퓨어 하베스트’ 등 외에도 중동에 사업 기반을 둔 국내 스타트업 디토닉, 애드쉴드, 베이콘, 쿼타랩 등에 투자하며 '중동 특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IMM인베스트먼트도 지난해 한국벤처투자가 진행한 모태펀드 해외VC 글로벌 펀드 출자사업에 중동 VC 벤처수크와 공동운용사로 선정되면서 1500만달러(약 215억원)의 출자금을 확보, 이를 토대로 최소 4000만달러(약 573억원) 규모의 자펀드 결성을 추진 중이다. 쇼룩파트너스와도 1억달러(약 1432억원) 규모의 신규 공동운용 펀드 1차 클로징을 마치면서 중동 기업 투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내 벤처펀드 최초로 사우디 자금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는 스틱인베스트먼트는 주요 LP로 중동의 주요 국부펀드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한 대형 사모펀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글로벌 PEF 운용사들도 중동에 직접 사무실을 열고 출자 받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라며 "중동의 주요 국부펀드들은 최근 사모펀드에 대한 출자 비중을 줄이고 벤처투자를 확대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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