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달 전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한 가지 씁쓸한 깨달음을 얻게 됐다. 지갑에 있던 카드를 정지하고 재발급받는 동안 내가 후원하던 단체와 매체의 자동이체가 멈췄다. 그때부터 풍경이 갈렸다. 어떤 곳은 곧장 전화와 메일로 ‘새 카드 정보를 알려달라’는 신속한 반응을 보였고, 어떤 곳은 몇 달이 지나도록 ‘결제가 실패했습니다’라는 문자만 반복했다. 그 반복 메시지는 잊힌 알람처럼 울릴 뿐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후자는 진보와 정의를 표방하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진보와 정의를 말하는 깃발이 업무의 성실성을 저절로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가치가 선명할수록 절차는 더 치밀해야 한다. 거대한 의제와 고귀한 명분이 조직의 품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카드가 바뀐 후원자 한 명에게 어떻게 연락하고 얼마나 빨리 문제를 풀어주는지가 그 품격을 완성한다. 작은 무능은 큰 가치의 설득력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물론 그렇게 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시민단체와 대안 매체는 상근자도 빠듯하고, 행정비용을 낮추라는 부담에 늘 시달린다. 내부에선 ‘핵심 활동에 돈을 써야지, 결제 실패 대응이 우선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하다. 현실의 제약은 실제이고 그 제약 속에서도 버텨온 노고를 폄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때문에 더욱 절차가 중요하다. 후원을 부탁한다는 건 신뢰 계약을 맺는 일이다. 계약의 최소 단위는 약속된 시점에 약속된 금액을 투명하게 다루는 것,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고 성실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진보와 정의라는 단어가 이 계약의 하자를 면책해주지 않는다. 행정의 성실이야말로 가치의 보증서다.
진보와 정의라는 단어는 계약의 하자를 면책해주지 않는다. (사진=챗GPT)
예컨대 이렇게 해보자. 자동이체 실패가 발생했을 때 24시간 내 연락률, 7일 내 복구율, 복구 실패 시 종료 안내의 친절도, 대체 결제 수단 안내의 명확성. 이 네 가지 지표만 꾸준히 관리해도 성실한 조직이라는 평판은 두텁게 쌓인다. 누군가의 헌신을 더하자는 추상적 공염불 대신 재발급 링크 하나를 더 빠르게 보내는 구체적 실행을 선택하자는 제안이다.
물론 후원자에게도 몫이 있다. 카드가 바뀌면 먼저 알리는 습관, 스팸함에 빠진 안내 메일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태도, 중단이 필요하면 예의 있게 종료 의사를 밝히는 책임. 관계는 쌍방의 성실로 유지된다. 다만 힘의 비대칭을 고려하면 선제적으로 손 내밀 의무는 후원을 받는 조직 쪽에 더 무겁게 얹힌다. 도움을 요청한 쪽이 먼저 안심을 주는 것, 그것이 공익을 표방한 조직의 자세다.
나는 ‘진보’의 가치를 믿는다. 그래서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이 기준은 과격한 요구가 아니다. 큰 구호보다 작은 확인, 선언보다 응답 속도, 도덕적 열정보다 절차적 친절을 먼저 챙기자는 제안이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건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해프닝이 내게 묻는다. 너의 정의는 결제 실패 알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결국 신뢰는 현장에서 측정된다. 하루 안에 건 전화 한 통, 클릭 세 번의 갱신 경로, 정중한 종료 안내가 쌓여 ‘정의의 생활력’을 만든다. 구호는 사람을 모으지만 성실은 사람을 남긴다. 나는 그 성실을, 카드 정보가 바뀌는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응대에서 확인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더 나은 사회의 시작, 아주 작고도 정확한 출발점이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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