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기자] 수려한 경관 이면에 깊은 상흔을 품은 강. 전남 곡성군 일대의 섬진강 물줄기는 겉보기에 평온하지만 수해의 진앙이 서린 곳입니다. 지류인 보성강과 본류가 만나는 압록 일대는 지난 2020년 8월 하류 유량 조절 실패로 대홍수의 시름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60년 넘게 이어진 물 배분 구조의 불균형과 기후위기로 인한 홍수, 관리 소외가 얽혀 있는 것이 섬진강의 현주소입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4대강 체계’를 ‘5대강 체계’로 전면 전환하기 위한 검토에 착수하면서 섬진강 유역의 환경 거버넌스 재구축 논의는 새 지평을 맞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섬진강 유역을 둘러싼 각 지방자치단체들의 공약인 데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인공지능(AI) 산업 거점에 안정적인 물 관리는 지역 생존을 넘어 국가 미래산업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장관(왼쪽)이 17일 전남 곡성군 소재 섬진강 침실습지를 방문, 습지 생태계 보전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물권 불평등’…섬진강청 ‘유치전’
지난 17일 <뉴스토마토>가 곡성, 광양 등 섬진강 현장을 찾았을 때도 유역 내 수자원의 체계적 관리가 얼마나 시급한지 한눈에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섬진강의 현실은 ‘물권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부터 풀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습니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의 고민도 이점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1965년 준공된 섬진강댐의 설계 구조상 하루 총 용수 공급량의 83.2%는 전북 동진강 유역(김제·부안 평야 등)으로 방류됩니다. 본류인 섬진강 하류(곡성·구례·광양)로 흘러드는 물은 16.8%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전북으로 물을 내주는 사이 하류 지역인 전남 곡성·구례·광양 등은 유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지자체 관계자들은 “사방에서 빨대만 꽂아 물을 빼내 가고 정작 필요 없을 때만 물을 버리는 강이 됐다. 갈수기 유량 부족으로 염분 농도가 상류로 치고 올라와 광양·하동 명물인 ‘섬진강 재첩’ 채취량이 급감했고 인근 농가들은 지하수 염해 피해로 신음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물권 불평등’에 대한 지역 간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기후부 측은 전북 지역 농사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 하구 쪽으로 약 20만~30만톤의 물을 더 돌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어촌공사가 가진 수리권 정비와 농림축산식품부 등 부처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고위 톱다운 협상 처방이 유일한 돌파구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섬진강은 국가하천 구간만 173.3km로 영산강(112km)보다 훨씬 길고 방대하지만 관리 당국의 손길이 역부족인 곳입니다. 현재 섬진강 유역의 환경 관리를 영산강유역환경청이 총괄하다 보니 영산강 중심의 행정 체계 안에서 섬진강은 늘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지역민들의 성토입니다.
현장 대응력의 한계를 풀 섬진강유역환경청의 조직 신설을 요구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영산강청 산하의 ‘섬진강홍수통제출장소’는 단 한 곳으로 상주 인력이 6명에 불과합니다. 이마저도 상습 침수 구역이자 현장 대응의 골든타임을 다투는 곡성·구례 하류 지역이 아닌 차로 1시간 반 이상 떨어진 전북 남원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상래 곡성군수가 17일 전남 곡성군 압록 인근에서 섬진강 유역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깊은 상흔을 품은 ‘곡성’
현재 섬진강유역환경청 유치를 가장 간절하게 염원하는 곳은 가장 소외되고 낙후된 곡성입니다. 인근 광양처럼 산업단지를 배후에 두고 자체 세수를 확보하는 도시들과 달리 곡성은 전형적인 농촌 자치단체로 지역 활력 제고가 절실한 소멸 지역입니다.
지역민들은 4대강 중심의 대규모 국책사업에서 철저히 소외돼 온 섬진강 유역 내에서도 또다시 곡성이 이중 소외를 겪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입니다. 무엇보다 섬진강 유역 내에서 가장 복잡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 곡성은 물길과 생태가 집약된 ‘섬진강의 수도’로서의 이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요천수와 보성강이라는 두 거대한 지류가 섬진강 본류와 차례로 합류하는 병목 지점입니다.
조상래 곡성군수는 “가장 위험한 현장에 통제소와 유역청이 있어야 실시간 통제가 가능하다”며 “국가 습지인 침실습지 전망대에서 5분 거리에 주거단지와 청사 부지를 갖추고 있다. 또 광주에서도 차로 40~50분이면 도달할 수 있어 행정적 접근성이 뛰어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장관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남원 섬진강홍수통제출장소에서 섬진강 유역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현실적 대안 ‘섬진강 지청’
관건은 실현 가능성 여부입니다. 기후부의 의지는 높지만 행정안전부와 예산당국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더욱이 정부 산하기관의 역할 조정 등 통폐합 개혁을 앞두고 있어 유역청 신설과 인력·예산을 늘려 줄지는 미지수입니다.
지자체 한 관계자는 “자치단체 간 유치 경쟁이 뜨거워질 테지만 ‘지방 소멸 대응’과 ‘균형 발전’이라는 대명제에도 부합해야 할 것”이라며 “조직 비대화 우려를 최소화하면서도 섬진강 유역을 전담할 실질적인 권한과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은 ‘지청’이다. 지청부터 시작해도 고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성환 장관은 “지방선거 전에는 지역 간 갈등 우려, 정치적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이 논의를 아꼈으나 이제는 속도감 있게 추진할 때”라며 “정부 부처 내에서 최종 조직 안이 확정되면 지자체 간에 불만이 없도록 공정한 심사위원회를 구성 ‘공모 절차’를 거쳐 최종 위치를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7일 전남 곡성군 소재 섬진강 침실습지 인근에 섬진강유역환경청 유치의 염원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전북·전남=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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