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2050 탄소중립 글로벌 의제로 자리 잡는 등 미래 철강 시장의 판도가 변화하면서, 기존 석탄 고로(용광로)를 전기로 또는 수소환원제철로 대체하는 ‘철의 대전환’은 국내 철강업계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탄소중립이 단순한 환경 이슈를 넘어 산업 경쟁력·에너지 안보·기술 주도권 등이 복잡하게 얽힌 국가 간 전략 수단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수십조 원의 투자와 인프라가 요구되는 탈탄소 전환을 개별 기업과 산업이 홀로 짊어질 수 없는 만큼, 해외 선진국 사례를 지렛대 삼아 실행력이 담보된 ‘민관 원팀’으로 K-철강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옵니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야적장에 철강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철강업계에 따르면 해외 선진국들은 철강산업을 단순한 제조업이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자산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직접적인 설비 보조금 지급과 전기료 감면 등 파격 지원을 통해 자국 철강산업을 보호하는 기류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독일 ‘CCfD’ 프랑스 ‘CAPN’
대표적인 국가는 독일입니다. 독일의 경우 ‘탄소차액결제제도’(CCfD)를 도입해 친환경 공정 전환 시 발생하는 높은 전기료와 수소 구입비 등 운영비 차액을 정부가 보전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권이나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 폭을 정부가 담보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제거해, 철강사의 장기 친환경 설비 투자를 끌어내겠다는 목적입니다. 특히 자국 철강사인 ‘티센크루프’에 대규모 친환경 설비 투자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대규모 재정 지원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일 정부는 수소 기반 직접환원철(DRI) 생산 설비·전기로 등 설비 투자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 그린 스틸 전환을 위해 약 20억유로(약 3조원) 규모의 재정을 단계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도 정부 차원에서 철강업계 탄소중립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설비 전환에 따른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고 ‘녹색산업법’을 통해 탈탄소 투자를 촉진하는 행정 지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기업이 원전 운영사와 장기계약을 맺고 원전의 발전 비용과 수익을 공유하며 안정적인 가격으로 전력을 공급받는 ‘원전 생산량 배분 계약’(CAPN) 제도를 도입해 탈탄소 전환의 핵심인 전력 공급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유럽 최대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은 프랑스 내 기업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영 전력사와 원전 PPA(직접구매계약)를 체결하고 안정적 무탄소 전력 공급망을 쥐게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 패키지인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법안’(OBBBA)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보조금과 세액 공제로 철강업계를 간접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안(K-스틸법)이 가결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처럼 해외 선진국들이 철강산업의 탈탄소 전환에 재정 등을 대폭 지원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정책 지원이 다소 미흡하다는 것이 업계 안팎의 중론입니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미국은 철강사의 수소와 같은 원재료 구입에 보조금을 지원해 매스 프로덕션(대량생산)으로 빅테크에 공급하는 등 시장의 판을 까는 방식을, 일본은 저탄소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수요를 자극하는 방식을 취해 시장을 확대해 나간다”면서 “유럽의 경우도 보조금과 설비 투자를 지원해 원가 부담을 떨어트려 시장을 만들어가는데, 한국은 이 같은 정책 지원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탈탄소 진짜 로드맵 마련할 때”
물론 한국 정부도 지난달 17일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 특별법’(K-스틸법)을 본격 시행하며 철강산업의 탄소중립 등 사업 재편을 본격 지원하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또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3일 한국형 탄소차액계약제도(K-CCfD) 설계 및 법령안 마련 연구 용역 입찰 공고를 내는 등 탈탄소 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 설계에 나선 상황입니다.
하지만 실제 보조금 지원이나 설비 투자 등의 직접적인 재정 지원, 탈탄소 전환의 핵심인 전기료 지원 등 업계가 요구하고 있는 실효성 있는 조치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저탄소 제품의 판매 활성화를 위한 초기 시장 환경 구축 등의 정책 방향도 확정된 것이 없어 철강업계의 한숨만 깊어지는 형국입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철강의 탄소중립 전환은 기술 개발 외에도 경제성 있는 무탄소 수소 조달과 안정적인 전력 공급뿐 아니라 생산부터 수송, 저장, 사용까지 이어지는 인프라 구축과 탄소저감 강재 프리미엄에 대한 시장 수용성 확보가 함께 전제돼야 한다”면서 “무탄소 에너지 인프라의 적기 구축 및 탄소저감 강재의 표준화 프리미엄 시장 형성 등에 있어 정부와 산업계의 협력이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AI 이미지를 활용해 탄소중립 철강 산업단지를 구현한 모습. (사진=제미나이)
학계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탈탄소 전환의 성공 열쇠가 결국 ‘민관 원팀’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별 기업이나 산업계가 탄소중립을 혼자 이룩할 수 없는 만큼 해외 사례를 지렛대 삼은 정부의 실행력 있는 정책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입니다. 민 교수는 “한국은 보조금 지급이나 철강제품에 대한 공급 및 수요를 자극하는 제도가 없기에 업계 스스로 막대한 투자 등 결단을 내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일 것”이라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만 얘기할 것이 아니고 기업과 함께 탈탄소 전환을 진짜로 실행할 수 있는 로드맵과 집중력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했습니다. <끝>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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