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28, 그리고 개성공단
2013-07-09 11:01:21 2013-07-09 11:04:32
[뉴스토마토 이보라기자] 작가 정유정의 신작 '28'은 '빨간눈 전염병'이 창궐해 인구 대부분이 죽어가는 '화양'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심리를 묘사했다.
 
좀비물이나 재난물에서 보듯 세상의 종말을 예견한 듯한 극한의 상황에서 정부는 없다. 정부는 점염병이 서울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화양에 계엄령을 선포해 도시를 봉쇄한다. 이렇다할 대책없이 감염자를 한 데 몰아넣는다.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판단아래 동네의 모든 개들을 사살한다.
 
그래도 문제가 풀리지 않자, 정부는 화양을 봉쇄한다. 폭력, 약탈, 강간 등이 빈발하는 '무정부상태'. 생존자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 혼란의 상황에서도 형사, 소방대원, 간호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전염병이 잦아들자 정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화양으로 헬기를 띄운다. 국민을 챙기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화양시민들은 자연스레 개성공단 입주기업인들을 연상케 했다. 이들은 정부의 투자보증을 약속받은 뒤 개성으로 입주했다. 갑작스런 북한의 변덕에 망연자실했지만 그들을 더욱 서럽게 한 것은 정부였다.
 
정부는 3000억원대의 금융지원과 각종 세금납부 연기 등 경영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며 국민들에게 공언했다. 기업인들은 700여억원의 대출을 받았을 뿐이다.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한 입주기업인은 "교통사고 보험금으로 차를 바꿨더니, 주위에서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그런가 보다고 하더라"며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국민들이 정부 발표만 믿고 우리를 (보상을 받았으리라) 오해하고 있다"고 억울해했다. 정부는 무책임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인들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법인장들 역시 "이 나이에 받아주는 회사도 없다"면서 울먹거렸다. 하나같이 얼굴은 거뭇거뭇했고 까칠했다. 이유없는 두통에 시달리고 병원에 입원한 이들도 다수다.
 
개성공단 근로자 관리인력인 법인장을 해고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기업도 있다. 3개월간 매출은 'ㅇ'이다. 바이어들과 거래가 끊긴 곳도 다수다. 간신히 거래처와의 끈을 잡고 있는 기업들도 행여나 거래가 끊어질까 구체적인 피해상황과 규모 등에 대해 언급하지도 못했다. 벙어리 냉가슴앓이었다.
 
정신적·물리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안 되겠다"며 "기계설비를 반출하겠다"고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실상을 알리고 공감을 얻기 위한 국토대장정도 시작했다.
 
상황은 기적처럼 반전돼 공단 정상화의 길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기업인들의 시의적절한 '액션'이 화해의 물꼬를 트게 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정부는 이제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북과 다시 마주하는 모양새다. 일단 천만다행이다.
 
내일 열릴 회담에서 정부의 목표는 북한으로부터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으로부터 확답을 듣는것도 중요하다. 다만 간과된 것이 있다. 정부를 믿고 투자했던 기업인들에 대한 정부의 책임있는 태도와 사후조치다.
 
이같은 일이 또 반복된다면 누가 정부를 믿고 경영활동을 벌일 수 있을까. 정권의 성향과 부침에 따라 기업인들의 생사가 좌우되는 것은 후진국임을 자임하는 꼴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의 밑림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역시 '정경분리'다.
 
남북 경제협력과 평화의 상징인 개성공단의 운영은 정부의 성향이나 이념과 상관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개성공단이 국제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민에 대한 무책임한 정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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