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기자)"생명 중심 '버스 문화'로 성숙한 사회를 꿈꾼다"
'과로사회 최전방' 늦깎이 버스기사…유쾌하고 먹먹한 삶의 언어를 읊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허혁 지음|수오서재 펴냄
입력 : 2018-05-31 18:00:00 수정 : 2018-06-01 08:41:24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지난 25일 새벽 2시 ‘빈 차’라는 글자만 보고 냅다 손을 흔들었다. 영등포 인근에서 손님을 못 태운 노란 택시 한 대가 양화대교를 건너 오던 참이었다. 행선지를 조심스럽게 묻고 승낙 받은 뒤 안전밸트를 매자마자 택시는 출발한다.
 
어둠 속 꽤 오랜 침묵의 시간. 묵묵히 운전을 하던 기사의 고백이 정적을 깨트린다. “원래 제가 버스운전기사였는디요…” 
 
그는 ‘안전’ 때문에 버스를 그만뒀다 했다. 워낙 빠듯한 배차 간격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다” 싶어 1년도 안돼 그만뒀다. 조금 적게 벌더라도 야간 택시를 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배차 간격이 빠듯하다 보니 제게는 운전이 ‘전쟁’처럼 느껴졌거든요. 특히 아침 출근 시간 때는 사고 낼 까봐 늘 조마조마했어요. 평소 느긋한 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요. 국가에서 안전한 ‘버스 시스템’을 만들기 전에 나는 이 일이 안 맞아 더 이상 못하겠다 생각했죠.”
 
그 택시기사의 고백이 뇌리를 떠나지 않을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열여덟 시간씩 버스를 모는 현직기사 허혁씨의 ‘나는 그냥 버스기사 입니다’. 현직 기사의 고충은 전직 기사와 어떤 지점에서 같고, 다를 것인지 궁금했다. 결국 책을 열어 보기로 했다.
 
허혁씨는 마흔 여덟에 버스 운전대를 쥔 ‘늦깎이 기사’다. 18년 하던 소규모 가구점을 그만두고 이 길을 택했다. 장애가 있는 딸아이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였다. 격일로 하루 18시간씩 운전대를 잡은 지 2년이 지난 시점부터는 글이 절로 써졌다. 낮에는 타인과 부대끼며 몸 속에 언어들을 새겼고, 저녁엔 “절대 노력 말고 즐기라” 당부하는 딸아이 잠 못 이룰까 방문 걸고 탈고했다.
 
저자에 따르면 버스기사들 사이에는 ‘적폐 속도’와 ‘공정 속도’가 있다. 적폐 속도는 효율이 우선이고 공정 속도는 사람이 우선이다. 착하게 살고자 공정 속도를 준수하려 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단말기로 운행 간격을 보며 앞뒤 차와 벌어지지 않게 사투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련하게 ‘잘 까고’ 다녀야 한다. 신호등이나 정류장의 정차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은어다.
 
“시내버스는 신호뿐만 아니라 정류장도 ‘잘’ 까야 얼른 가서 밥을 먹는다. 사람이 밥만 먹는 것은 아니다. 담배 피워야지, 양치질해야지, 급하게 몰아넣었으니 억지로 방귀도 뀌어놔야지. (중략) 무정차 고발 들어가면 벌금 내고 쉬는 날 교육받고 누적되면 해고 사유니까 정류장 까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전투처럼 치뤄지는 운행 만큼이나 버스 안의 세계도 복잡다단하다. 다양한 세상을 돌며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는 만큼 내면의 다양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민원받이’처럼 생각하거나 “기사 놈 어쩌나 보자”는 식의 권위주의를 마주할 때면 속이 뒤틀릴 때가 많다. 반대로 안타니까 어서 가라고 손을 열렬하게 저어주는 이들에게는 미소를 짓고 그들이 보여준 ‘인문학’의 근원을 살핀다. 하루에 세상에서 가장 착한 기사였다가 가장 비열한 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아예 빨강, 노랑, 파랑으로 기사의 감정상태를 알려줄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모든 감정 노동자의 가슴에 명찰 대신 ‘감정 표시등’을 달아주는 상상을 해본다.”
 
저자의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들은 이 책의 가장 큰 묘미다. 유쾌하기도, 때론 먹먹하기도 한 삶의 언어들이 버스 노선을 차곡, 차곡 밟아나가 듯 전개된다.
 
“짐이 많은 분, 지팡이 든 노인, 아이 있는 엄마는 시간을 좀 더 주긴 하는데, 딱 봐서 칠십세 이하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간다. 물론 시그널은 준다. ‘가요, 잉!’“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달리다가 갑자기 눈 앞에 마이산의 두 귀가 쑥 들어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고 울었다. (중략)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별 것 없었다. 내가 대견해서 그렇게 울었다.”
 
온 몸으로 ‘과로 사회’ 최전선을 체감하는 만큼 바로 잡아야 할 버스 제도들도 서슴없이 짚어낸다. 배차 시간 조정, 정비 지연 개선, 버스 청소 일자리 만들기 등이다. 특히 “생명 중심의 교통 시스템을 만들어 우리사회가 성숙해졌으면 한다”는 이야기에선 며칠 전 택시기사의 넋두리가 어렴풋 떠올랐다.
 
추천문은 대리운전을 타인의 감수성 문제로 확장시켜 주목 받았던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씨가 썼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은 버스기사들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간식을 선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금은 따뜻한 눈으로 그들의 세계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허혁‘들’이 왜 오늘도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지 (중략) 그들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게 된다. 모두의 삶에는 나름의 이유와 방식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사진/수오서재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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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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