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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 ‘허스토리’, 몰랐기에 더욱 죄스러웠던 그녀들의 실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관부재판’ 실화
단순한 위안부 피해 아닌 현재의 고통과 삶 집중
2018-06-08 16:51:19 2018-06-09 21:51:06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30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길면 길다. 하지만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이 살아온 고통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우선 너무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지금은 생각조차 불손한 취급을 받아 마땅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향해 ‘매춘’ ‘창녀’라며 부른 일부 몰지각한 국내 시선이 실제로 있었단 점이다. 경악스러웠다. 불과 30년도 안된 1992년 어느 날이다. 영화 ‘허스토리’는 일본 시모노세키(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무려 6년에 걸친 재판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낸 위안부 피해 할머니 열 분과 부산의 한 여행사 대표(여성)의 실화를 그린다.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놨던 이른바 ‘관부재판’ 실화가 이 영화의 모티브이자 베이스다. 아니 그들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121분이다.
 
 
 
지금도 ‘국가 대 국가’로 첨예하게 대립 중인 ‘위안부 피해 보상’ 문제는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영화는 각각의 개인이 나서서 주도한 집념이며 부끄러움을 말한다. 그 부끄러움의 배경에는 인간적 성찰도 같은 여성으로서의 공감도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진짜는 딱 하나다. 바로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이었고, 그것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열 분의 할머니들. 그들은 이 땅에 살아 계신 동료 피해자들을 위해 나섰다.
 
영화 속 배경이자 실제 이야기 속 시간은 1992년이다. 그 시절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야만의 세월처럼 느껴진다. 아득하게 먼 시간 속 공간도 아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세상의 손가락질 속에서 세월을 견디며 가느다란 삶의 끈을 쥐고 있다. 더욱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일본의 그 시절 패악이 아니다. 같은 민족 내 가족들의 외면이다. 아프다. 과거의 빼앗긴 시간과 삶을 찾고 싶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들은 외롭다. 내 나라 내 가족에게조차 환영 받지 못하는 삶의 상처다.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고름을 닦고 싶다. 아니 닦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 나와 같은 피해를 입은 그 시절 내 동무를 위해서. 더 이상 고개 숙이며 살고 싶지 않다. 부산의 한 여행사 대표인 문정숙(김희애)은 “부끄러워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산 게”라며 이 할머니들의 삶이, 이 할머니들의 상처가, 이 할머니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숙여진 고개와 축져진 어깨를 힘껏 들어 올려 준다. 같은 여자로서 같은 국민으로서. 그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영화 '허스토리' 스틸. 사진/NEW
 
영화는 실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 사건과 약간의 극화를 통해 러닝타임을 구성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의 시간 동안 총 23회에 걸쳐 이뤄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과정은 고난하고 고통스럽다. 되새김질되는 고통의 순간과 그들을 향한 일본과 국내의 멸시 그리고 외면은 차라리 견딜 만 하다. 열 분의 할머니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지난 시간을 들춰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문 사장의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배정길 할머니(김해숙)는 평생을 숨겨 온 위안부 피해 사실 그리고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손아귀에 쥐고 있던 또 다른 비밀을 결국 재판을 통해 공개할 때는 피눈물을 흘리며 일본을 향해 일갈한다. “다시 열 일곱 그때로 나를 돌려 놓으라”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은 그 세상이 왜곡한 ‘돈 문제’도 사실 ‘진정한 사과’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세월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하며 잊고 지낸 상처까지 들춰냈지만 정작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그 현실에 대한 너무도 고통스런 서운함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그 시절 지옥 같은 현실을 잊어가지만 자신들이 겪었던 그 시간과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 자리에 머물러만 있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 사진/NEW
 
‘허스토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할머니들의 그 시절 지옥의 시간을 바라보지 않는다. 현재의 삶 속에서 끝나지 않은 고통의 진행형을 바라본다. ‘관부 재판’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보상 문제에서 가장 뜻 깊은 결과를 이뤄낸 것도 현재 생존해 있는 문 사장(실존 인물이지만 극중 이름은 아님)과 현재는 모두 돌아가신 열 분의 원고인단 할머니들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원한 것이 아닌 현재의 아픔을 끝낼 방법으로 택한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들은 그 지옥의 세월을 자신들의 선택과 잘못이 아닌 오롯이 일본의 폭압이 만들어 낸 죄악임을 일본 스스로가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배정길 할머니의 마지막 일갈은 그래서 죄인이지만 스스로가 만들어 낸 죄악의 시절을 패자 콤플렉스로 뒤덮으려 하는 일본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민 낯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 사진/NEW
 
무엇보다 ‘허스토리’의 유의미성은 극중 재일교포 이상일 변호사(김준한)와 문 사장의 대화를 통해 짚어낸다.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재판이 길 바란다’는 이 변호사의 입장과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문 사장의 생각이 6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지점이다. 불과 30년도 안된 이 생소한 사건이 지금에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여러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시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남아 있지 않은 토막의 이미지로 사라진 것처럼. 아직 생존해 있는 재일교포 변호사와 문 사장의 실존 인물은 이제부터 이 싸움의 시작을 선언한다. 영화는 그렇게 ‘허스토리’로서 막을 내린다. 아니 ‘허스토리’로서 ‘그녀들의 이야기’가 시작됐음을 알린다. 이건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이다. 개봉은 오는 27일.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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