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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연구소의 주인은 누구인가
2020-05-21 06:00:00 2020-05-21 06:00:00
기초과학연구원 IBS는 해방 이후부터 지속된 한국 과학자사회의 염원이다. 하지만 창립 이후 줄곧 스타과학자 한 명에게 엄청난 연구비를 집중시켜 노벨상을 받겠다는 유치한 발상으로 비판받아 왔다. 단장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은 권위가 없는 곳에서 창발하는 기초과학 연구에 해가 되며, 이미 IBS 단장들에게서 나타난 각종 사건사고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단장들이 밉다고 연구소를 폐쇄할 수는 없다. 그 곳엔 묵묵히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과학의 희망은 이미 성공한 스타과학자가 아니라, IBS를 통해 한국에서 성공할 바로 그 학문후속세대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BS 특별점검에서 비극적인 통계가 발견됐다. IBS의 대졸 신입 행정직보다, 석박사 연구원의 연봉이 더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IBS에서는 행정직은 호봉제로, 연구직은 연구연봉제를 통해 급여를 지급받는데, 연구연봉제에서는 상하한선을 정해놓고 연구단장이 자율적으로 급여를 설정한다. 그래서 IBS 연구역량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박사급 연구위원의 연봉 하한선은 학사 출신 행정직의 평균 연봉 아래에 머물러 있다. IBS는 설립 이후 해외의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초기에 IBS에 합류했던 박사급 인력들의 처우와 직업안정성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해외 고급 인력들이 IBS 취업을 꺼린다는 소문에 시달리는 중이다.
 
연구소는 연구를 주된 업무로 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문재인정부가 2018년 2월 ‘2019년 공공기관 지정안’을 심의 의결하기 직전까지, 한국 연구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정출연이 강원랜드나 예술의전당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를 받아왔다는 뜻이다.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정출연이 단지 법률 때문에, 수익창출과 대국민서비스, 국민친절도 평가 등을 받아야 했다는건 비극이다. 정출연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환경을 위해 이 법안을 발의한 사람은 물리학자 출신의 신용현 의원이었다. 
 
연구소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연구소는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므로, 연구를 수행하는 인력, 즉 연구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연구소의 본질이 연구이기 때문에, 연구소의 행정직 인력은 연구를 지원하고 연구소가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오직 그런 목적 하에서만 연구직과 행정직은 함께 연구소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의 주인공은 당연히 연구직 인력이다. 하지만 한국 연구소에서 연구직은 행정직의 눈치나 봐야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과학자라는 직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대학이 아닌 출연연에서 9개월째 근무 중이다. 해외에서 주로 연구했던 나에게, 출연연의 낯선 환경은 묘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행정업무를 인터넷 익스플로러로만 처리할 수 있고, 국정원의 명령으로 연구소 내에선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다.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몇 시간씩 전화와 이메일로 씨름을 해야 했고, 출장을 한번 가려면 각종 사전심의서와 신청서 그리고 보고서를 놓고 씨름해야 했다. 
 
행정직원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연구원들의 연구효율보다 그들의 편의가 중요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책임을 떠넘기려는 공무원의 복지부동과, 연구편의가 아닌 행정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관료주의가, 출연연 내에 강하게 퍼져 있다. 내가 만나본 연구원들은 모두 행정편의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연구소는 벌써 수십년째 요지부동이다. 이런 환경에선 연구라는 활동이 지속될 수 없다. 행정이 연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송희경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출연연 비정규직의 비율은 전체 인력의 23.4%를 차지하는데, 이 중 연구인력이 21.3% 행정직이 2.2%로 나타났다. 물론 연구직 대 행정직의 비율을 고려해야 하는 통계이지만, 그걸 고려해도 연구인력의 비정규직화는 과학기술계의 심각한 위험신호다. 이런 상황에선 그 누구도 연구를 직업으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MRC를 노벨상의 산실로 만든 연구소장 막스 페루츠는, 연구소의 성공 요인을 묻는 질문에 관료주의가 연구를 장악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의 연구원들은 낮은 연봉과 행정편의주의에 신음하고 있다. 연구소를 장악한 관료주의가 한국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Woo.Jae.Kim@uottaw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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