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삶과 죽음
2025-05-20 06:00:00 2025-05-20 06:00:00
외부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클 때 세력이 약한 쪽은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로 무너진다. 외부의 공격 또는 내부의 분열. 공동의 적이 있을 때 안으로는 결속력이 커지기도 하지만 쉬이 양극으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분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해서 분열 중에 충신과 간신이 구별되기도 한다. 그럼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충신일까, 간신일까.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전하.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먼저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 아니옵니까.”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옵니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런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전 차마 그런 임금은 받들지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서는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서로 대적한다. 최명길은 청의 공격에 항복하고 치욕을 견디는 삶을, 김상헌은 청에 끝까지 대항하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생명을 유지하고 잃는 것을 의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삶이 진정한 삶인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누군가는 모욕을 견디더라도 살아 있는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 것을 명예로운 삶의 마무리로 여길 수도 있다. 어떤 말이 더 옳은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최명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김상헌의 말에도 격하게 공감했을 테니까. 두 사람 모두 옳기 때문이다. 
 
둘 다 옳다는 것을 이율배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율배반이 아니다. 그들의 말이 오로지 군왕과 백성과 나라를 위한 사심 없는 충언임을 알아 우리는 그 말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둘의 논쟁을 단순히 말싸움 또는 편싸움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다. 최명길은 끝내 자신의 뜻을 인조에게 관철시켰지만 임금에게 말한다. ‘상헌은 하나뿐인 충신이니 부디 그를 버리지 말라’고. 그에게 뜻이 같고 다름은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김상헌이라고 달랐겠는가. 올곧은 마음은 뜻이 달라도 서로 통하는 법이다.
 
중립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 진짜 간신은 영의정 김류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이쪽에도 저쪽에도 붙는다. 이판도 죽이라고 하고 예판도 죽이라고 한다. 지금의 대선 정국에서도 김류는 많이 있다. 물론 늘 있어왔다. 이른바 ‘철새’들. 그들의 철새 짓은 소신인가 기회주의인가.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치인의 진심은 일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관은 무겁다. 양극단에 서 있는 이들은 비록 다툴지언정 무겁고, 양극을 마음대로 오가는 이들은 비록 유연할지언정 가볍다. 치욕스런 삶과 명예로운 죽음 사이에서 ‘명예로운 삶’을 택하려는 자들은 끝내 ‘치욕스런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믿는다. 그들의 가벼움을 우리 국민이 가볍게 허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승연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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