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타깃 교환사채 발행 '줄줄이'…금감원 무방비
8월 이후에만 13건 자사주 빼돌리기 공시
금감원 "관할 밖"…"현장 지도 등 강력 경고 필요"
2025-09-06 06:00:00 2025-09-06 06:00:00
[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시작된 가운데 법 제정 전 자사주를 빼돌리려는 교환사채(EB) 발행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대부분 자사주 전량을 교환 대상으로 지정한 EB입니다. 증권사들은 수수료 수입에 눈이 멀어 EB 발행 마케팅에 여념 없고, 금융당국은 의도가 보이는 꼼수에도 마땅한 제재 수단이 없어 두 손 놓고 있습니다. 현황 파악을 시작한 한 의원 관계자는 내용에 따라 현장 지도를 포함한 강력한 경고에 나서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자사주 소각에 1주도 안 내준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8월 이후 지금까지 EB 발행 계획을 공시한 상장기업은 15곳에 달합니다. 9월 첫 주에만 벌써 4건입니다. 
 
이중 15개 기업 중 링크드와 이스트소프트를 제외한 나머지 13개 기업은 모두 EB의 교환 대상을 자기주식 즉 자사주로 지정했습니다(표 참조). 평소 1년에 몇 건 없는 EB 발행, 그것도 교환 대상을 자사주로 특정한 사채 발행 건이 급증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자사주를 담보로 한 EB 발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현재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논의 중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기 전에 서둘러 처분하겠다는 것입니다. EB는 채권 만기일 전에 채권자가 원하는 경우 EB를 교환 대상으로 지정한 자산과 교환, 채권을 상환하게 됩니다. 이 경우 교환 지정 대상이 자사주입니다. 
 
급하지도 않은 운영자금, 시설자금 등을 지금 시점에 갑자기 자사주를 넘겨 조달한 것은 운영자금이 목적이 아니라 자사주 처분이 목적이었음을 모르는 투자자는 없습니다. 특히 13개 기업 중에서도 7개 기업은 현재 보유 중인 자사주 전량을 교환 대상으로 삼았는데요. 이는 자사주 규모에 맞춰 EB를 발행했다는 뜻입니다. 정부와 국회가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단 1주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금액도 적지 않습니다. 13개 기업이 발행하는 EB 규모만 6000억원에 육박합니다. 자사주를 소각해 주주환원에 쓰일 재원 6000억원어치 주식이 EB 발행으로 다른 투자자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하림지주의 경우 13.16%에 달하는 자사주 1474만주 전량을 EB 교환 대상으로 내걸어 NH투자증권에 1432억원어치를 통째로 넘길 예정입니다. 정부 정책의 눈치를 볼 것으로 예상됐던 그룹사도 있습니다. SK가 최대주주로 지배하는 SKC가 1250억원어치 자사주 108만주를 교환 대상으로 EB를 발행한 것입니다. 전량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남겨둔 자사주는 20만주, 0.54%에 불과합니다. 
 
(표=뉴스토마토)
 
금융당국 “제재할 방법 없어”…국회 “강력 경고”
 
EB를 발행한 기업들은 주식 교환가액을 현재 주가보다 5~20%가량 높게 책정해 헐값 매각 논란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EB를 인수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주식을 그만큼 대량으로 매수할 경우 5~20% 프리미엄 얹는 정도로 매입하긴 쉽지 않아 이같은 딜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EB 발행 기업은 자사주를 처분할 목적으로 사채를 발행했고 인수자는 예상보다 비싸지 않게 주식을 확보할 수 있어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B 인수자들은 대부분 사모펀드입니다. 지난 4월 최대주주의 EB 셀프 발행으로 자사주를 취득해 지분율을 대폭 올린 리파인처럼 대주주가 EB로 자사주를 취득하는 사례는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중엔 실제 처분이 아니라 파킹 거래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EB 인수자 명단엔 사모펀드 외에도 증권사들이 상당수 끼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NH투자증권은 하림지주와 SKC, 국도화학 등 굵직한 기업들의 EB를 인수해 그들의 자사주를 처리해줄 예정이며, 신한투자증권은 삼천당제약과 씨엔지하이테크 EB 인수자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증권사들이 EB 인수자들의 신탁사로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게다가 증권사들은 자사주를 보유한 상장기업들을 찾아다니며 EB 발행을 제안하는 등 영업도 하고 있습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EB로 길을 만들어준 증권사는 모두 만족할 만한 거래였겠지만 일반 주주들은 이 결정으로 보유 주식 가치가 훼손됐습니다. EB 발행 결과 채권 대금은 회사로 유입되겠지만, 주주환원 재원이 운영자금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정대로 법이 통과돼 자사주가 소각됐다면 보유 주식 가치는 소각분에 비례해 상승했을 겁니다. 주주가치 제고를 내걸고 다른 한편에선 주주가치 훼손을 대리한 증권사들이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사주 빼돌리기가 버젓이 진행되고 있어도 금융당국은 마땅한 제재 수단이 없어 보입니다. 금감원 관계자는 “공시주의 원칙에 따라 공시에 문제가 있는지를 보기 때문에, 내용상의 문제가 있다고 해도 관할 밖”이라고 답했습니다. 
 
금융위원회 역시 태광산업 EB 발행은 서류 미비로 반려된 경우이고 지금 공시하는 기업들을 제제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국회 쪽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제도적 전환기란 맹점을 이용해 그것도 주주가치 회복에 힘써야 할 증권사들이 단기 실적에 눈이 멀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데 강력한 경고가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의원 관계자는 “금감원에 곧바로 관련 자료를 요청해 현황을 파악하겠다”며 “검토 결과 문제가 있을 경우 현장 지도를 포함해 금융당국의 강력한 경고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7월15일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코스피5000특위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특강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