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현철 기자] 공공기관 주무관을 사칭해 관급공사 업체로부터 물품 선결제를 유도하는 사기가 기승을 부리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조달청이 나라장터에 '사기 주의보'를 상시 발령하고 있지만, 업체의 실제 계약 이력을 정확히 파악한 정밀 타깃팅과 관급 시장의 음성적 관행이 맞물리면서 현장에서는 방어막이 무력화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관급공사는 공문서를 통한 계약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선 일부 공무원들이 편의를 위해 '선시공 후계약' 방식을 요구하는 관행이 여전합니다. 사기범들은 바로 이 빈틈을 악용했습니다. 계약 실적 하나가 간절한 지역의 영세 업체들로선 '갑(공공기관)'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든 구조도 피해를 키웠다는 분석입니다.
사기범이 공무원을 사칭해 소방용품을 구입해달라고 보낸 문자. (사진=뉴스토마토)
1000만원 피해…"기관서 찍히면 '불이익' 걱정"
16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인천 소재 관급공사 업체 대표 A씨는 지난해 말 인천 소재 기초자치단체 공무원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속아 1000만원 정도를 잃었습니다. 사기범은 A씨에게 접근, "조달 구매는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걸리니까 물품을 선결제 해주면, 추후 공사비에 포함해 보전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A씨는 "경기가 어려워 관급공사 하나가 절실한 마당에 관청에서 도와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며 "자칫 제안을 무시했다가 찍히면 나중에 일감 받는 데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예전에 소규모 관급공사를 할 때 기관에서 '급하니까 일부터 해달라'라는 부탁을 받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인 줄 알았다"고 덧붙였습니다.
A씨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였습니다. 해당 기관에 "물건 보냈는데 받으셨느냐"고 물었다가 "그런 적 없다"는 답변을 듣고서야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과거 '공사 이력' 정확히 알아…의심 힘들었다"
다른 업체 관계자 B씨도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당할 뻔했습니다. B씨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인천시청 주무관, 인천 소재 고등학교 주무관을 사칭한 인물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기범은 B씨 업체가 과거 인천시청에서 수행한 공사 이력을 정확히 언급하며 접근했습니다. B씨는 "우리가 인천시청에서 공사한 걸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모르겠다"며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처음에는 진짜 공무원인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인천 소재 고등학교 주무관을 사칭한 사건도 수법은 비슷했습니다. 사기범은 "내일 학교에서 특별 재고 감사가 있다"며 "화재 진압 장비를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하는데, 기존 거래 업체가 가격을 높여서 비교해보고 싶다"고 접근했습니다. 질식소화포 10개, 개당 250만 원으로 총 2500만 원 규모였습니다.
B씨가 이런 제안이 사기임을 알아챈 건 회사 내부 결재 체계 덕분이었습니다. 사기꾼들이 요구한 건 결제 규모가 컸기 때문에 내부 결재 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해당 기관에 확인 전화를 한 결과 사기임을 알게 됐습니다. B씨는 "소액이었으면 의심도 하지 않고 바로 처리했을 것"이라며 "금액이 작았으면 나도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시공 후계약' 관행 없다면 이런 사고도 없다"
B씨는 이런 사기가 통하는 배경으로 관급공사 시장의 음성적 관행을 지목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관급공사는 나라장터를 통한 공식 입찰과 계약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법보다 다른 관행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B씨는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공무원들이 '급하니까 먼저 해달라, 나중에 서류 처리하겠다'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업체들이 믿고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업계에서는 공무원들이 편의를 위해 긴급한 사안을 공문 없이 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관행이 여전하며, 사기범들은 바로 이 지점을 범죄에 악용하고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사기범들이 '질식소화포'를 미끼로 삼은 점도 이런 상황을 노려 치밀하게 계산된 수법으로 보입니다. 질식소화포는 자동차 등에 불이 났을 때 특수 천으로 화재를 덮어 산소 공급을 차단하는 장비입니다. 최근 전기차 화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화재 대응 장비를 갖추려는 공공기관의 수요가 급증한 상황을 노린 것입니다.
소방용품 업계 관계자 C씨는 "요즘 이런 문의가 유독 많다. 그런데 대부분 사기 피해자"라며 "이 때문에 오히려 소방용품 업계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어 "전기차 화재 대응 수요가 늘면서 질식소화포를 찾는 공공기관이 많아졌는데, 사기범들이 이 틈을 노리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조달청 경고에도 현장 방어막 '무력'
조달청은 나라장터 메인 화면에 '조달청·수요기관 사칭 사기 주의' 안내문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조달청 사칭, 수요기관 담당자 사칭 등 유형별 사기 수법을 안내하며 주의를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실제 계약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밀 타깃팅에는 이런 경고가 무력하다고 토로합니다. 사기범들이 단순히 공공기관을 사칭하는 수준을 넘어, 업체의 실제 과거 공사 이력과 거래 기관을 정확히 파악한 뒤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B씨는 "나라장터 통해서만 거래하라는 게 원칙인 건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보니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이런 일이 전혀 없었으면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 실제로 그렇게 해온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계약 하나하나가 간절한 업계 특성도 피해를 키우는 요인입니다. A씨는 "요즘 경기가 어려우니까 관급공사 하나 받으면 얼마나 감사한데, 공무원이 '급하다, 빨리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안 해줬다가 일감 떨어지면 자기가 손해인데"라고 했습니다.
김현철 기자 scoop_pres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