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박진석 기자]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연루된 파리바게뜨 노조 파괴 혐의 재판이 22일로 97회차를 맞습니다. 공판이 100회를 넘는 사례는 대형 경제 사건이나 거물 정치인이 연루된 특수 사건처럼 증인신문과 증거조사가 방대하게 이뤄지는 경우에나 볼 수 있습니다. 단일 기업에서 벌어진 노조 탄압 재판이 이토록 길어지고 있다는 건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방증합니다. <뉴스토마토>는 허 회장 재판 100회를 계기로 SPC그룹 전반으로 뻗어 나간 노조 탄압의 실상을 연속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SPC그룹의 핵심 자회사인 SPL에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을 상대로 승진 불이익과 업무 배제 등 가혹한 노조 탄압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지난 2020년 228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했던 노조는 현재 단 5명만 남았습니다. 불과 68개월여 만에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면서, 노동자 권익 보호라는 본연의 역할이 완전히 마비된 실정입니다.
21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020년 11월 설립된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SPL지회의 현재 조합원 수는 5명입니다. 설립 당시에는 SPL 직원 228명이 뜻을 모아 가입했으나, 회사의 집요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탈퇴하면서 노조 활동을 포기한 겁니다.
지난 2022년 10월24일 20대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SPL 공장에서 경찰과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이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사진=뉴시스)
"노조 설립 초부터 회사가 탄압"…조합원 대거 탈퇴
SPL지회는 설립 초기부터 회사의 대대적 탄압에 시달렸다고 증언합니다. 팀장, 계장, 주임 등 관리자급 직원들이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SPL지회에 계속 남아 있으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노골적으로 탈퇴를 종용했다고 했습니다. 회사의 전방위적 압박에 지회 설립 불과 20여일 만에 전체 조합원의 과반이 넘는 152명이 무더기로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정도입니다.
회사의 압박은 단순한 협박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부 조합원들은 기존에 담당하던 전문 업무에서 갑자기 배제된 채, 지난해까지 아무런 공식 업무도 배정받지 못하고 공장 내 잡무만 전전해야 했습니다. 조합원 중에는 10년이 넘는 숙련된 경력을 가진 고연차 직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어느 날부터 자신보다 연차가 한참 낮은 비조합원 직원들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는 등 모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현재 SPL지회장인 A씨는 지회 설립 전까지 5년간 단팥빵 제조 설비를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지회에 가입한 직후 해당 업무에서 배제됐습니다. A씨는 "다른 부서로 발령된 것도 아닌 채 공장 내 허드렛일만 맡았다"며 "특정 공정에 인력이 부족할 때 투입되거나 쓰레기 정리 등을 하며 사실상 퇴사를 압박받는 '책상 빼기'와 유사한 상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17년간 근무하는 동안 동기들은 관리자급으로 승진했지만, 지회 가입 이후 승진에서 제외됐다"고 덧붙였습니다.
올해 초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SPL을 퇴사한 전직 조합원 B씨의 증언도 일치합니다. 그는 "업무에서 배제돼 담당할 업무가 없다 보니까 출근할 때마다 관리자에게 그날 할 일을 물어봐야 했다"며 "퇴사하거나 SPL지회에서 탈퇴하라고 묵시적으로 종용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회사는 SPL지회 조합원과 비조합원 직원이 단순 대화만 하려고 해도 이를 막아서며 조합원들을 고립시켰다"며 "너무 많은 괴롭힘을 받다 보니 SPL지회에 가입한 것이 후회될 정도"라고 했습니다.
지난 2022년 11월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SPL 공장에서 발생한 20대 노동자 사망 사고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명만 남은 민주노총 SPL지회, 끝내 법적 대응 포기
허영인 SPC그룹 회장은 민주노총 파리바게뜨지회 탄압을 주도한 혐의로 지난 2024년 4월 구속기소돼 현재까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총수가 법정 공방을 벌이는 와중에도 계열사인 SPL지회를 향한 회사의 압박은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괴롭힘은 지난해 초에야 숨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압박을 멈춘 배경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회장 A씨는 "이전 지회장이 지속적인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퇴사한 후, 지난해 초 제가 지회장에 당선됐다"며 "당선 직후 회사를 찾아가 '앞으로 아무런 노조 활동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남은 조합원들만이라도 그만 괴롭혀 달라'고 호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조합원이 다 탈퇴해 손발이 잘린 노조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 비참한 호소 이후에야 SPL지회를 향한 탈퇴 종용과 압박이 비로소 멈췄다"고 씁쓸해했습니다.
SPL에선 지난 2022년 공장 내 소스 배합기에 20대 노동자가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노조는 그런 회사에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며 노동자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조직입니다. 그러나 집요한 탄압으로 조합원이 5명만 남게 되면서, 이제는 와해를 넘어 사실상 노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상황이 이렇지만 SPL지회는 법적 대응조차 포기해야 했습니다. 보안상의 이유로 공장에서 근무할 땐 휴대전화를 소지할 수 없었고, 회사의 부당한 지시나 압박 정황을 증명할 녹취록 등의 핵심 증거를 확보할 길이 원천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SPL에서 벌어진 행태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은성 샛별 노무사사무소 대표공인노무사는 "회사가 SPL지회에 한 행동들은 정황상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이자 노조 탄압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이를 입증할 객관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라며 "노동자가 업무 배제나 '뺑뺑이 인사'를 증명할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회사가 '정당한 경영 및 인사상 조치'라고 주장할 때 법적으로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편, <뉴스토마토>는 지난 19일부터 SPC그룹에 연락을 시도해 SPL에서 벌어진 노조 탄압 등에 관해 입장과 반론을 요청했으나 현재까지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박진석 기자 ptba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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