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자본시장에 유입돼야 할 유동성이 다시 부동산으로 쏠리는 '역 머니무브' 흐름이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습니다. 코스피, 코스닥 지수가 이틀 연속 서킷브레이커를 맞을 정도로 시장이 붕괴하고 있지만, 주주가치를 외면한 기업, 안일한 대책의 정부, 입법이 느린 국회가 투심을 더 꺾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시스템 리스크 수준의 증시 폭락을 방관하면, 시장에 대한 신뢰를 잃어 외국인 투자 이탈도 더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하루에만 증시 58조 증발, 부동산엔 유입
30일 금융투자협회 및 자본시장 전문가 등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국내 주식시장의 자금 이탈은 엑소더스 수준입니다. 가장 최근 조사일인 28일 기준, 주식시장 대기 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약 107조1000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6월 말 130조원대에 달하던 예탁금은 이달 1일 120조원으로 내려앉은 뒤 한 달도 안 돼 13조원가량 급감했습니다.
투심 악화는 신용 뇌관도 건드렸습니다. 지난 21일에는 위탁매매 미수금 대비 실제 반대매매 금액이 595억원을 기록, 반대매매 비중이 5.7%까지 치솟았습니다. 강제 청산에 따른 시장 충격이 겹치면서 투자자들의 공포를 키웠습니다.
증시 자금 증발은 펀드 투자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이달 6일 823조5000억원에 달했던 국내 주식형 펀드의 순자산총액(평가액)은 27일 710조3000억원으로 급감한 데 이어, 28일에는 651조7000억원으로 단 하루 만에 58조6000억원이 공중 분해됐습니다. 이달 초 대비 누적 감소액은 무려 171조8000억원(-20.8%)에 달합니다. 실질 투자 원금인 주식형 펀드 설정원본(AUM) 역시 6일 491조6000억원에서 28일 428조5000억원으로 급락했으며, 28일 하루에만 21조4000억원이 추가 이탈했습니다.
주식시장을 탈출한 자금은 부동산으로 향했습니다. 같은 기간 부동산 펀드 설정원본은 197조8000억원에서 28일 199조원으로 약 1조2000억원 순증했습니다. 평가액 역시 205조8000억원에서 206조7000억원으로 올랐습니다. 부동산114 집계 결과, 지난주 전국 아파트는 0.14%, 서울(0.16%)과 수도권(0.17%) 등 주거 선호 지역을 중심으로 뚜렷한 상승세를 이어가며 자금 쏠림을 증명했습니다.
방관한 기업·안일한 정부·느린 국회
이번 폭락장은 거시적 요인 외에도 국내 자본시장을 이끄는 3대 주체인 기업·정부·국회의 방기가 빚어낸 참사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기업들의 소극적인 주주가치 방어 의지가 주가 폭락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부각됐습니다. 반도체 주도주인
SK하이닉스(000660)는 2분기 사상 최대 수준 이익을 냈지만 시장 컨센서스를 하회했습니다. 그보다 실적 발표 전 이미 주가가 폭락한 상태에서 별도의 대응책이나 주주환원 계획을 내놓지 않아 실망 매물을 키웠다고 시장은 분석합니다.
특히 본주의 ADR(주식예탁증서) 전환이 어려워 주가 괴리를 키운다는 우려가 줄곧 제기돼 왔으나, ADR 상장 후 한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 사 측은 원론적 입장만 내놨습니다. 전날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원주를 ADR로 전환할 때 발행사가 규제상 신고 절차를 밟아야 할 수 있어 통상 수주 이상 걸릴 것”이라며 “ADR 비중 확대 여부는 관련 규제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할 예정으로, 현재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만 했습니다.
상장 후 한때 30%가량 폭등했던 ADR 역시 본주 폭락 여파로 지금은 공모가를 밑돌게 됐습니다. 통상 미국 증시에서는 주가 급락 시 기관투자자들이 나서 경영진 교체나 강력한 자사주 매입 소각 등을 요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국내 기업은 주가 방어 대책에 수동적입니다.
정부의 안일한 대응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19 사태 당시에는 공매도 한시적 제한이나 증시 안정 펀드 투입 등 기민한 대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 시스템 리스크를 상회하는 지수 낙폭에도 레버리지 정도만 손보는 등 대응 폭이 좁습니다.
정책 입법을 뒷받침해야 할 국회 역시 사실상 손 놓은 실정입니다. 8월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계파 갈등에 매몰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추가 대책 추진력은 실종됐습니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주가 누르기 방지법, 의무공개매수제도, 소수주주다수결(MoM), 중복상장 금지 등 산적한 자본시장 법안들은 정권 1년을 넘긴 시점에서도 표류 중입니다.
시장의 분노는 자본시장의 3대 주체를 모두 향하고 있습니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무대책인 기업들을 향해 "주식회사의 주인이 주주인데, 주인 대접을 안 하고 일종의 소모품 취급해 온 게 그동안의 관행"이라며 "주주를 최우선, 최상단에 놓고 대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 대표는 정부의 늑장 대응에 대해서도 "정부가 '언 발에 오줌 누기'식밖에는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 대실망"이라며 "공매도 한시 금지 청원이 이미 올라와 벌써 만 명 가까이 됐다. 폭락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도 않고 대책도 없는 것은 민심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행태"라고 직격했습니다. 이어 "민심이 더 싸늘하게 돌아서기 전에 공매도 금지를 한시적으로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아울러 국회를 향해서도 "좋은 해법을 방치하고 눈앞에 보이는 당리당략에 치우치다 보니 민생을 챙기지 못하고 있다"며 "특정 정당만 잘 나가면 되는 게 아니라, 민생이 최우선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한 주주 모임 대표는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여당의 부재라고 생각한다”며 “자본시장 개혁이니 상법 개정이니 거창하게 떠들었을 뿐 여당과 국회가 내놓은 법안들은 자사주 의무 소각 법안이 대표적인데, 그마저도 기업들이 빠져나갈 우회로를 다 열어둔 '누더기 법안'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국내 주요 재벌 기업들도 주가를 부양하거나 유지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며 “자사주 소각 등 가장 손쉬운 주주가치 제고 방안이 있는데도 기업들은 ‘다각도 검토’라는 핑계로 시간만 끌고 있고, 중복상장 금지법은 옥상옥 지배구조를 만드는 편법 상장 등을 국회가 그대로 허용해 주며 개인투자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한 채 기업들의 대관 창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폭락장을 방치하는 사이, 자본시장 체질 개선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렵게 증시로 향했던 자금들이 다시 부동산으로 유턴하면 '부동산 불패 신화'만 또다시 증명하는 꼴로, 생산적 자본 배분의 실패와 자산 양극화라는 고질적인 경제·사회적 병폐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생산적인 기업 투자로 향해야 할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리는 것은 국가 경제의 자원 배분 측면에서 뼈아픈 손실"이라며 "증시 침체를 이대로 방치하면 기업 혁신은 위축되고 부동산 가격만 다시 뛰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결국 정부의 신뢰 회복 정책, 국회의 입법 지원, 기업의 적극적인 주주환원이라는 3박자가 시급히 가동돼야만 건강한 자본시장을 지켜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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