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전환사채(CB) 등 복합금융상품 가치평가 시 실무에서 사실상 표준으로 쓰이던 TF모형(Tsiveriotis-Fernandes)의 구조적 한계를 한국공인회계사회(이하 한공회)가 인정했습니다. 복잡한 리픽싱(전환가액 조정) 조건이 붙은 한국형 메자닌 평가에 기존 모형이 부적합하다는 시장의 지적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금융위원회, 금감원, 회계기준원 등 규제 당국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거나 “검토해 보겠다”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오류를 인정한 한공회도 실제 지침 개정에는 실무적 한계를 보여, 시장에선 당국의 실효성 있는 적극적 행정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대형 회계법인 심리실이 문제”
31일 각 금융당국에 직접 해당 문제를 제기한 천태철 현무회계법인 (세무사 겸)공인회계사에 따르면 그동안 실무 가이드에서 제시되던 TF 모형은 단순한 조건에는 유용하지만, 주가 변동이나 특이 조건(경로의존성)이 많은 복합금융상품을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천 회계사는 한공회가 발간한 복합금융상품 실무가이드가 형식적으로는 참고자료일 뿐이나, 실제 외부 감사 현장에선 특정 평가 모형(TF 모형)만을 강제하는 준규범처럼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리픽싱 등 복잡한 조건이 붙은 상품에는 TF 모형이 부적합함에도 다른 타당한 모형(LSMC, 최소자승법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등)이 배척당하고 있어 재무제표가 왜곡되고 있으니, 금융당국에 명확한 지침과 해석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최근 한공회는 “제기한 쟁점은 복합금융상품의 공정가치 측정과 내재파생상품 분리라는, 발행·보유기업의 결산 부담 및 평가 보고서의 품질과 직결되는 핵심사인인 만큼 우리 회도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대안모형의 균형적·기술적 검토 반영 요청은 타당하며 향후 실무사례 개정 시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전면 개정에 앞서 적용전제·한계·주의 문구를 보강하는 보완을 우선 추진하고 전문가 검토를 거쳐 단계적으로 진행하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내놨습니다.
하지만, 규제 당국들은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입니다. 금융위는 "해당 실무가이드는 한공회의 자체 발간물로 감독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고, 회계기준원은 "어떤 가치평가기법이 적합한지는 당사자가 판단할 사항"이란 취지로 답했습니다. 그나마 금감원은 "향후 감리 업무에 참고하겠다"고 했지만 원론적인 답변 수준입니다.
비록 한공회가 개정 의향을 밝혔지만 진행 경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관측이 나옵니다. 그동안 부적절한 평가 모형이 강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형 회계법인들의 경직된 실무 관행 때문입니다. 천 회계사는 "한공회의 실무가이드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대형 회계법인 심리실의 경직성이 있다"며 "감사인들 사이에서는 'TF 방식이 아니면 심리실 통과(Accept)를 못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천 회계사는 이어 "이로 인해 경제적 실질과 괴리되어 재무제표가 완전히 어그러지는 금융상품이 계속 나오고 있고, 평가 손익으로 인한 왜곡이 지금 당장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2025년 결산서 드러난 '고무줄 회계' 민낯
천 회계사가 2025년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 상장사가 부적절한 모형이나 자의적 해석을 통해 장부가 왜곡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A사의 경우 270억원 규모의 영구전환사채를 발행해 놓고, 장부상 파생자산으로는 그 2배에 가까운 500억원을 인식했습니다. 원금을 아득히 초과하는 파생자산이 탄생하며 회사의 자산이 비상식적으로 부풀려진 사례입니다. B사 등 4개 기업은 CB에 붙은 파생자산(콜옵션)과 파생부채(풋옵션)를 산정할 때 서로 다른 평가모형을 섞어 썼습니다. 옵션 간의 상호작용이 무시되고 기초 변수가 엇갈리며 평가의 내적 일관성이 무너졌다는 분석입니다. C사 등 일부 상장사는 명백한 상·하향 리픽싱 조항이 있음에도, 과거 금감원의 유권해석(회제이-00094)을 방패 삼아 파생부채를 0원(자본 분류)으로 처리하며 표면적인 부채비율을 낮추고 재무건전성을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고무줄 회계'가 자본시장에서 어떤 파국을 낳는지는 최근 스마일게이트 1심 판결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재판부가 판단한 바에 따르면 앞선 C사 등과 달리 스마일게이트는 상장 요건(당기순이익)을 고의로 맞추지 않기 위해 자본 분류 여지를 무시하고 원칙대로 '부채'로 분류, 5357억원의 파생금융부채 평가손실을 인식했습니다. 법원은 "아무리 회계 기준상 원칙에 부합하더라도, 이를 악용해 투자자와의 상장 약속(신의칙)을 위반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판시했습니다. 기계적인 재무제표 작성 논리가 경제적 실질과 계약의 본질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금융당국의 방관과 회계업계의 보신주의 속에서, 한국형 메자닌 시장의 '회계 왜곡'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부적절한 가치평가가 기업의 순자산을 왜곡하고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밸류업 프로그램의 지표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당국의 실효성 있는 관리·감독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28일 금융위원회 회의 모습. 사진=금융위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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