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급발진 논란)②"제작사 면죄부"…사고기록장치 EDR '유명무실'
제동 페달 작동 여부만 표시
'가속페달 100%, 제동 OFF' 대부분
제조업체 면죄부 증거로 작용
충돌 전 기록 시간도 5초 불과
EDR 분석기 일반판매 주장도
2023-10-25 15:43:35 2023-10-25 18:17:12
 
[뉴스토마토 황준익 기자]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A씨가 급발진 의심으로 12세 손자를 잃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가속페달을 밟았다'며 사고기록장치(EDR) 분석 결과를 내놓았지만 가족들은 이를 신뢰할 수 없다며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약 7억6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급발진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EDR에는 할머니가 가속페달을 100%로 밟았으며 브레이크는 전혀 밟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원고 측은 운전자 A씨가 차량이 오른쪽으로 뒤집힌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계속 밟았다는 EDR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차량이 전복되고 몸도 옆으로 쓰러지는 상황에서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99~100% 지속해서 밟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급발진 사고시 EDR의 신뢰성 문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EDR이란 자동차의 충돌 사고 전후 일정한 시간 동안 차량속도, 엔진회전수, 브레이크 작동여부 등의 운행정보가 기록돼 급발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실마리로 작용하는 장치입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 현장.(사진=강릉소방서)
 
현행 자동차관리법은 자동차 제조사가 EDR에 15가지 항목을 기록하는지를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안을 통해 차량 제조사의 EDR 기록 공개를 의무화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급발진은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EDR이 오히려 완성차 업체의 '면죄부'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급발진 의심 사고를 낸 운전자들은 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주장하는데 EDR상 페달이 작동한 적 없다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근거로 제조사는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강하게 밟아 사고가 났다고 주장합니다. 브레이크 작동 기록이 남았더라도 페달을 '충분히 강하게 밟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반박할 길이 없습니다.
 
EDR에서는 가속페달의 경우 밟은 정도(스로틀밸브 열림량 또는 가속페달 변위량)가 기록되지만 브레이크는 작동 여부만 표시되기 때문입니다. 스토틀밸브는 기화기 또는 스로틀 보디를 통과하는 공기량을 조절하기 위해 여닫는 밸브로 액셀 페달과 연동해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량을 조절합니다. 가속페달 변위량은 가속 정도를 %로 변환해 나타내며 99%부터 '풀 액셀’로 평가됩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사고 이후 EDR의 분석 자료는 하나같이 100(스로틀밸브 100% 열림), 99(가속페달 변위량), OFF(브레이크 작동여부)라는 동일한 기록으로 나온다"며 "가속페달을 최대로 밟아서 스로틀밸브가 모두 열리고 브레이크는 밟지 않았다는 뜻으로 제작사의 면죄부로 작용하는 증거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동차 급발진 자체가 발작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자동차의 두뇌인 전자제어장치(ECU) 자체에 문제가 크다는 반증인데 이를 거쳐서 나온 EDR의 데이터는 신뢰성에서 큰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사고기록장치(EDR).(사진=연합뉴스)
 
김철수 호남대 미래자동차공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케이블로 이어진 가속페달을 통해 스로틀밸브가 열리고 닫혔는데 현재는 가속페달 눌린 정도를 센서가 감지해 스로틀밸브를 조절한다"며 "스로틀밸브에 이상이 생겨 잘 닫히다 열린 채로 변해버리면 대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3월 '사고기록장치 장착기준'에 의무화된 15가지 기록 항목에 '브레이크 압력 센서값'을 포함하도록 하는 법령 개정안을 연내 입법예고할 예정이며 제조사와도 협의가 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브레이크 페달에 가해진 압력이 기록되면 브레이크 작동 여부에 대한 논란은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국토부는 EDR의 길이를 5초에서 20초까지 늘리는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현행 규정상 EDR은 사고 전 5초 동안의 운행정보를 저장합니다. 급발진 의심 사고들은 고속주행이 수십 초간 이어질 때가 많아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충분한 기록이 확보되고 있지 않습니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역시 차량이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약 30초 동안 질주했지만 국과수가 분석할 수 있었던 건 사고 직전 마지막 5초의 EDR 데이터뿐이었습니다. 미국은 올해 현행 5초에서 20초 이상으로 늘리는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태입니다.
 
다만 정부는 방지책 마련에 미온적입니다.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일 국토부와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대한 자료 요구 회답을 확인한 결과 국토부가 제동 압력 센서값 기록 제도화, 페달 블랙박스 장착 추진 등 조치에 대해 여전히 검토 또는 협의 중이라는 입장만 밝히고 이를 증빙할 문서는 일절 제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EDR 분석기 일반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미국은 연방법으로 자동차 회사가 신차를 내놓으면 90일 안에 EDR 분석기를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제조사에 강제하고 있습니다. 반면 현대차(005380)·기아(000270)는 국내 판매 규정이 없다는 점과 개인정보 문제 등을 들어 일반 판매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는 "급발진 사고의 입증책임을 소비자가 져야 하는 상황에서 필수 자료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불합리가 발생한다"며 "제조사의 EDR 분석기 일반 판매, EDR의 사고 기록 저장시간 증가, 조향각 정보추가 등 EDR 데이터의 고도화 등을 통해 예방과 원인 규명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황준익 기자 plusik@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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