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5평 독방에 갇혀 지낸 채 수십 년간 사상 전향을 강요당한 이들이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문과 폭력 그리고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 속에 자기학습을 되뇌며 신념을 지켜온 이들, 우리는 그들을 비전향장기수라고 부른다.
비전향장기수는 한국 현대사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다. 분단의 상징이자 반공의 산물이며, 권위주의 체제의 극단적 폭력성을 하나로 응축시킨 용어이다.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좌익 장기수들은 인간의 존엄이 파괴된 채 오직 ‘굴복’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어둡고 습한 독방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매일같이 전향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야만의 시대, 그들은 개인의 신념과 존엄을 지켜낸 양심수였다.
비전향장기수는 크게 네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국전쟁 전후 입산 빨치산과 남파공작원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작간첩과 반독재투쟁 과정에서 실형을 받은 공안사범이나 반국가사범 중 일부가 전향을 거부한 채 장기수로 복역했다. 이 가운데 30년에서 40년 이상 복역한 최장기수는 대체로 빨치산과 남파공작원 출신이다.
좌익 사상범은 형기를 마쳐도 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출소할 수 없었다. 사회안전법에 의해 2년마다 형기가 갱신됐고, 사상 심사를 거쳐 끊임없이 수감 생활을 이어갔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포로로 생포된 스무 살 청년은 머리가 희끗한 예순 살 노인이 돼 십오 척 담장 밖을 나왔다.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된 고(故) 김선명 선생은 45년을 복역했고, 현 생존 최장기수인 안학섭 선생도 42년 4개월을 복역했다. 세계적으로 최장기 복역수로 잘 알려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27년 복역 기간이 한국의 비전향장기수 수형 기간과 비교하면 참으로 무색해진다.
국가권력은 체제에 반하는 이들에게 강제 전향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폭력과 고문을 동원해 전향 공작을 벌였다. 1974년 7월, 비전향장기수 박융서 선생은 바늘로 온몸이 찔리는 고문을 받은 뒤 감방 벽면에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사상전향서는 결코 ‘그깟 종이 한 장’이 아니다. 한 인간의 존엄이며 신념이자 양심이다. 개인을 무력화하고 모든 인간적 희망과 믿음까지 분쇄하는 것이 전향 공작의 속성이다. 사상 전향 기제에 ‘굴복’이 깔려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강제 전향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조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좌익 장기수 6명이 북송을 원한다며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양원진(1929년생·97세), 안학섭(1930년생·96세), 박수분(1931년생·95세), 김영식(1933년생·93세), 양희철(1934년생·92세), 이광근(1945년생·81세) 선생이 그들이다. 국가보안법과 국방경비법 등으로 이들이 수감 생활을 한 기간만 무려 167년 10개월이다. 물론 여기 6명에 포함되지 않은 북송 희망자도 더 존재한다.
1990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세 번의 북송이 있었다. 1993년 3월19일 김영삼정부 출범 첫해 한국전쟁 종군기자 출신 리인모 선생이 ‘장기 방북’ 형태로 송환됐고, 김대중정부의 6·15남북공동선언 후속 조치로 그해 9월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됐다. 그리고 노무현정부인 2005년 10월2일, 과거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63명 북송 명단’에 포함되지 못한 고(故)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가족이 있는 북녘으로 보내졌다.
감옥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으며 강제 전향을 당한 이들은 정부를 대상으로 강제 전향 취소 요구를 해왔으나 묵살됐고, 그런 이유로 이들은 북송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뒤늦게 가족 품에 안긴 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었다.
비전향장기수 문제는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다. 남북 간 극한 대립 속에서 남한 정권이 취한 강력한 반공 정책으로 인해 발생했다. 온몸을 바쳐 통일을 염원한 이들이 이제 북송을 통해 남북 인도주의 교류의 불씨를 살리고자 한다. 그간 끊겼던 남북 대화 채널의 복원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그들에게 마지막 쉼이 허락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결단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정찬대 고려대 학술연구교수/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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