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주심, 다른 잣대…아리셀참사서 사라진 '실질적 안전조치' 판례
대법, 비상구·비상통로 의무 '무죄' 유지해
천대엽 대법관, 5년 전 판례와 정반대 결론
법조계 "설명조차 없다…법관 양심 저버려"
2026-10-21 14:08:50 ㅣ 2026-10-21 14:36:41
[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노동자 23명이 숨진 아리셀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4년을 확정한 대법원 1부 주심은 천대엽 대법관입니다. 대법원이 비상구·비상통로 유지 의무 위반을 무죄로 본 항소심 판결을 유지하면서 형량을 다툴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이는 천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과거 산업재해 대법원 판례와 배치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천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그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오른쪽), 천대엽 대법관이 지난 3월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노태악 대법관 퇴임식에 퇴임사를 들었다. (사진=뉴시스)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천대엽)는 지난 20일 박 대표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의 상고심에서 양측 상고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이로써 박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던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4년으로 대폭 감형한 항소심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천 대법관은 이날 선고기일에서 “양측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만 말했습니다. 
 
하급심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비상구·비상통로 유지 의무에 대한 대법원 판단은 없었습니다. 판결문에도 이 쟁점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비상구·비상통로 문제는 아리셀 참사의 인명 피해를 키운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2024년 6월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 2층에서 1차 리튬배터리가 폭발하며 불길이 번졌는데, 노동자들은 발화 지점 반대편의 비상구로 대피하지 못했습니다. 비상구로 가는 길에 보안장치와 가벽이 설치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통로에는 전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산업안전보건규칙에 따르면, 비상구와 비상통로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1심은 “피고인들이 비상구·비상통로 유지 주의의무를 위반해 피해자들에게 사상의 결과가 발생했다”고 판결했습니다. 반면 2심은 비상구·비상통로 유지 주의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산업안전보건규칙상 비상구·비상통로에 관한 규정이 형사처벌의 근거가 될 만큼 구체적이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항소심의 이러한 무죄 판단이 감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입니다.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법률지원단 손익찬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유족과의 합의가 주요 양형 사유로 판단됐다”면서도 “비상구·비상통로 관련 혐의가 박 대표에게 적용된 건 아니지만, 박중언 아리셀 총괄본부장 등의 의무 위반이 인정됐다면 박 대표 양형 판단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고심에서 양형 자체가 판단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형사소송법상 징역 10년 미만 사건은 양형 부당을 이유로 상고할 수 없습니다. 형량을 다시 다툴 방법은 무죄 판단을 깨고 파기환송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마지막 가능성마저 사라졌습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천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2021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 사고 판례와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2017년 5월 노동절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조선소에서 크레인 충돌로 하청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습니다. 하급심은 크레인 중첩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안전 조치 기준이 법령에 명시돼 있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삼성중공업 법인 등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 일부를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천대엽)는 2021년 9월 이 부분을 무죄 판결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창원지법에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해당 안전보건규칙과 관련한 일정한 조치가 있었다고 해도 해당 산업현장의 구체적 실태에 비추어 예상 가능한 산업재해를 예방할 수 있을 정도의 실질적인 안전 조치에 이르지 못할 경우에는 안전보건규칙을 준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법령에 크레인 중첩 작업에 대한 신호 방법 등이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작업 특성과 사고 위험을 고려하면 사업주에게 구체적인 안전 조치 의무가 인정된다는 취지입니다. 
 
손 변호사는 “천 대법관은 5년 전 판례와 정반대 결론을 내리면서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며 “법조인으로서 양심을 저버렸으니 설명도 못한 것”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이어 “판단 자체를 안 해서 법리가 바뀐 건 아니지만, 검찰과 법원이 소극적 판단을 하도록 경향은 바뀌게 될 거다. 우려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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