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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썩은 건 도려내도 또 썩는다
2020-11-09 06:00:00 2020-11-09 06:00:00
이달 초 호주 정부는 공직자의 부정 부패를 수사하는 연방청렴위원회설립을 위한 법안 초안을 공개했다. 이미 주 정부마다 부패방지위원회를 갖고 있음에도 더 강력한 권한의 기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우리 돈으로 무려 1000억원 가까운 초기 예산을 들여 만드는 이 위원회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 비리 의혹을 받는 인사의 가택 수색은 물론 영장을 발부받아 재산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과 체포 권한을 갖는다. 법원 명령을 받아 여권을 압수할 권한도 주어진다. 특히 주목할 점은 조사 목적의 전화 도청이 허가되고, 이 외 다른 감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거의 모든 수단을 합법화하겠다는 뜻이다,
 
호주는 청렴한 공직 사회로 유명한 나라다. 단돈 1달러도 엄연한 뇌물로 보는 정치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한 공기업 대표가 수천 억 원을 벌어다 준 직원들에게 고가의 시계를 선물했다가 구설수에 오르자 사퇴하는 일도 있을 만큼 결벽에 가까운 클린 정치를 내세우는 나라다. 그럼에도 이처럼 강력한 기구를 만드는 것은 공직자 비리행위가 0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방심하지 않겠다는 실천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호주도 이런 문화가 자리 잡을 때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30여 년 전만 해도 비리 판사와 경찰, 공무원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1989년 반부패위원회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나라를 좀먹는 공직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의 시작과 더불어 달라진 건 바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나랏일을 하는 자는 부패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인식. 그리고 이것은 바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저 정도 쯤이야 뭐 봐줄 수도라는 안일한 생각은 통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정쟁만 오가고 있다. 1996년 처음 논의가 시작된 뒤 24년간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에게 향할 칼날을 두려워해서 인가. 아니면 그 칼날을 쥐고 있던 자들이 다른 이에게 그것을 건네는 것을 두려워해서 인가.
 
이들은 입만 열면 엄정한 법 집행이라고 말하며 공수처 무용론을 말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최근 5년간 고소·고발된 검사와 판사에 대한 기소율은 각각 0.2%, 0.3%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전체 형사 사건의 기소율은 34.2%에 이른다. ‘제 식구 감싸기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검찰의 기소편의주의와 기소독점주의가 빚어낸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제 식구에겐 아끼던 칼을 밖으로는 마구 휘두른다. 검찰의 표적수사 의혹은 어제도, 오늘도 진행형이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러니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갈수록 떨어진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 검찰은 201247.2%의 신뢰도를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올해는 신뢰도 31.0%로 경찰, 법원보다 낮았다. 국민 10명 중 7명은 검찰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거듭 나 셀프 개혁을 하겠단다.
 
썩은 덴 도려낼 수 있죠. 그렇지만 아무리 도려내도 그 자리가 또다시 썩어가는 걸 저는 8년을 매일같이 목도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왼손에 쥔 칼로 제 오른팔을 자를 집단은 없으니까요. 기대하던 사람들만 다치죠.”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주인공 조승우가 연기한 검사 황시목은 이렇게 말했다. 공수처 설치,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한시라도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호주의 사례처럼 청렴이 우리 공직 사회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수처가 바로 마중물이 될 것이다.  
 
이승형 산업부 에디터 sean120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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