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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나와 당신과 우리의 속도는 다르다
2020-12-04 00:00:00 2020-12-04 00:00:00
재택 근무가 이어지면서 딸과 아들 일상이 눈에 고스란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녀석도코로나19’로 뜸하게 가는 학교 수업에 연일 환호성이다. 하지만식사시간만 되면 내 앞에 잔뜩 겁을 집어 먹는다. 특히 딸이 그렇다.
 
아침 저녁으로 밥상머리 반찬 가운데 야채만 쏙쏙 골라내 먹는 딸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버럭 하는 나는공포의 아빠’, 잔뜩 겁을 집어 먹으면서도 꿋꿋이 야채를 골라내 먹는 딸은눈물 뚝뚝처량한 딸이다. 어릴 때야 그렇다 쳐도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날 때까지 야채를 거부하면 어쩌란 말인가. 걱정되는 난 더 이상 딸이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 “골라내지 말고 다 먹어라고 다그치면 딸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부답이다.
 
최근 반복되는 전쟁 같은 식사다. 오늘 아침 일이다. 시금치 된장국에서 시금치를 빼고 국만 떠먹는 딸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막 한마디 하려는 찰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을 감지한 딸이 먼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아빠, 그냥 기다려 주면 안돼?” 자기도 노력 중이고 그냥 기다려주면 언젠간 다 먹을 거라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순간 말 문이 막혔다. 세상에 이런 못난 아빠도 있나. 개미 목소리로 아빠에게 전한 딸의 첫 부탁에 난 말문이 막혔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라 다그치기만 했던 게 너무 미안했다. 딸은 자신만의 속도로 노력 중이었는데. 내 기준에 못 따라온다며 윽박지르기만 했다.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속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한다. 나 역시 부모님이 내 속도를 안정하고 기다려 준 덕분에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딸에겐 야채를 안 먹는다 혼냈지만 생각해 보면 어릴 때의 나 역시 몇 년 동안 계란프라이 하나에 밥을 먹는 지독한 편식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때 부모님은 다그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주셨다. 덕분에 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는 건강한 식단의 소유자가 됐다. 그랬던 내가 정작 내 딸에겐 내 욕심의 속도에 맞추라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굳이 성장 영화란 이름표가 붙지 않더라도 모든 영화는 성장을 그린다. 영화 속 주인공은 결말 에 이르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성장의 속도는 각각이다. 영화마다 다르고 한 영화 안에서도 인물마다 다르다. 주인공이 빨리 각성해 멋지게 나섰으면 좋겠단 생각에왜 아직도 저러고 있냐며 의자에 앉아 분통을 터트려 봐야 소용없다. 주인공은 자신의 속도대로, 주변 인물은 그들의 속도대로, 적당한 때와 여건이 갖춰졌을 때 성장해 변화한다. 영화전문기자로 그 동안 봐온 영화가 대체 몇 편인데 이 명료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단 말인가. 40대 중반의 나도 아직 한참 더 성장해야 하나보다.
 
세상을 살아보니 빠른 게 꼭 좋지만은 않단 것쯤은 안다.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경제양극화 그리고 어쩌면코로나19’까지. 우리는 빠르게 살아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다. 빠른 건 효율적일 수 있지만 느리게 갈 때 더 옳은 방향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건 느림의 미학일지 모른다.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증명해야겠다. 일단은 야채를 먹기 위해 노력하는 딸의느린속도를 존중하는 것부터 난 시작한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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