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시끄러운 권리'의 가치
2026-06-05 14:57:42 2026-06-05 14:57:42
“잘 사는 공산국가.” 최근 싱가포르 출장길에 만난 한 기업 주재원은 눈부신 도시국가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화려한 마천루와 막대한 부가 넘쳐흐르는 이 도시국가는 겉보기엔 티 없이 매끄럽고 완벽한 ‘유토피아’다. 하지만 번영의 장막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철저한 설계와 빈틈없는 제어로 굴러가는 눈부신 풍요 속에 숨죽인 그림자가 있다. 
 
자원 하나 나지 않는 척박함을 딛고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약 9만8000달러(약 1억3000만원) 수준으로 아시아 최고이자 세계 최상위권에 달하는 이 부국의 일상은 국가의 치밀한 설계대로 굴러간다. 휴지 조각 하나 없는 도심을 유지하기 위해 청소 노동자들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새벽에만 움직여 흔적을 지운다. 생맥주 한 잔이 2만원을 훌쩍 넘기고, 식당에서 물티슈 하나를 뜯는 순간 비용이 청구되는 살인적인 물가 탓에 시민들에게 텀블러와 손수건은 생존 필수품이 됐다. 아반떼 한 대 가격이 2억원을 넘기고 절반이 세금으로 매겨질 만큼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정부는 사회 전반을 빈틈없이 통제한다. 관료 사회가 누리는 파격적인 대우는 강력한 제어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장관 초임 연봉이 10억원을 훌쩍 넘길 정도로 공무원들이 막대한 보상을 받는다.
 
국가 주도의 통제력은 산업 현장에서 압도적인 속도전으로 이어진다. 도심 곳곳에 남은 공사 흔적과 아침마다 울리는 크레인 소리의 시끄러움은 성장을 향한 맹렬한 질주를 대변한다. 이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산업의 심장부인 항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노조 활동이 정부 승인 아래 철저히 통제되는 싱가포르 항만은 노동계의 반발을 원천 봉쇄한 채 100% 무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싱가포르 도심의 야간 도로에서 노동자들이 소형 트럭 짐칸에 탑승한 채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한국은 자동화 추진마다 꼬리표처럼 노조 반발이 뒤따른다. 지난해 부산 북항 취재 당시 스마트 항만 구상에 대한 추가 질문에, 관계자는 노조 반발을 의식해 도리어 보도 축소를 당부할 정도였다. 국내 조선업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한화가 미국 필리조선소를 스마트 조선소의 테스트베드로 삼은 행보 역시, 피할 수 없는 혁신의 과제와 험난한 국내 노사관계 사이에서 빚어낸 고민의 산물일 터.
 
하지만 싱가포르의 무결점에 가까운 혁신 이면에는 노동자의 위태로운 일상이 철저히 가려져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는 짐칸에 사람을 가득 실은 트럭이 수시로 질주한다. 짐칸 탑승을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승인받은 차량들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던 풍경을 현실에서 마주한 듯한 시각적 충격이 밀려왔다.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쌓아 올린 밑바탕에는 철저히 소외되고 통제된 ‘노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한국은 비정규직과 하청을 넘어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 문제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크고 작은 진통을 겪고 있다. 굳건했던 삼성조차 파업 직전까지 치달을 만큼 사회 전체가 갈등으로 소란스럽지만, 최소한 일하는 자가 당당히 제 몫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살아 숨 쉰다. 효율을 위해 통제된 고요함으로 지탱되는 부국을 마주하고서야, 트럭 짐칸에 실린 그들의 뒷모습 너머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시끄러운 권리’의 가치를 다시금 곱씹게 된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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