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가격 급등이 소환한 일 반도체 붕괴 ‘평행이론’
집단소송 등 미국내 칩플레이션 불만 팽만
80년대 미국, 일본에 통상 압박 전례 상기
AI시대 공급망 핵심…"일본과 한국은 달라"
2026-07-28 15:59:07 2026-07-28 16:04:17
[뉴스토마토 이보라·이명신 기자]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가 인공지능(AI) 메모리 호황에 힘입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면서, 급등한 메모리 가격이 미국의 통상 압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미국이 1980년대 통상 규제와 엔화 가치 상승을 통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했던 상황이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현재는 미국 빅테크들이 한국산 AI 메모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도 과거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당시와 같은 압박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업계에서는 통상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28일 업계에 따르면 메모리 가격을 둘러싼 미국 내 반발이 기업 차원을 넘어 정치권과 사법부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22일(현지시각) 미국 상원 재정위원회에서 “무역 적자를 줄이고 미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관세 부과와 협상을 계속 활용할 것”이라며 “무역수지 적자 해소를 위해서라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끊임없이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아울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D램 공급을 인위적으로 줄여 가격을 끌어올렸다고 주장하는 집단소송도 제기됐습니다. 지난달 25일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제기된 이 소송에는 개인 소비자와 소규모 PC 관련 업체 등 17명이 원고로 참여했습니다. 원고 측은 세 회사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확대를 명분으로 범용 D램인 DDR3와 DDR4 등 범용 D램 공급을 인위적으로 축소했고, 그 결과 지난 4년간 D램 가격을 폭등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집단소송 승인과 판매금지 명령, 손해액의 최대 세 배에 해당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애플과 퀄컴 메모리가격 불만 제기
 
아울러 애플과 퀄컴 등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최근 공개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팀 쿡 애플 CEO는 최근의 메모리 가격 폭등에 대해 “40년 넘게 일하며 처음 보는 100년에 한 번 있을 대홍수”에 비유하며, “소비자들은 기기를 원하지만 공급은 부족한 상황에서 메모리 업체들이 엄청난 가격 인상을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며, 현 상황은 지속하기 어렵다”며 메모리 업계를 향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역시 실적 발표를 통해 “메모리 공급 부족 사태가 모바일 시장 전체 규모를 결정지을 정도로 심각하며, 주요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에 직접적인 생산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가격 문제가 고객사의 원가 부담을 넘어 미국의 통상 이슈로까지 번질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제주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포럼에서 “지금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비정상”이라며 “가격은 떨어져야 한다, 칩플레이션이 심화하면 지정학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최 회장은 이날 “칩플레이션이 나타나면 지정학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옛날에 똑같이 일본도 맞았던 이야기”라며 “주요국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980년대 미국의 통상 압박에 반도체 패권을 내준 일본의 전철을 밟기 전에 선제적 공급 확대로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18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제49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폐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실제 업계에서도 AI 메모리가 각국의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전략물자로 떠오르면서 가격 문제가 통상 갈등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메모리는 이제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각국의 AI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물자가 됐다”며 “가격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르면 고객사와 각국 정부의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미 견제에 꺾인 일 반도체 산업
 
최 회장의 말처럼 메모리 가격의 급격한 상승이 국가 간 통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에는 40여년 전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퇴가 있습니다. 당시 세계 D램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기업들이 미국의 통상 압박과 엔화 가치 상승 등을 거치며 경쟁력을 잃었던 것처럼, 한국 반도체 산업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1980년대 세계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미국 업체들을 밀어냈습니다. 1985년에는 D램을 처음 상용화한 인텔마저 수익성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업에서 철수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며 1980년대 중반 매출 기준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NEC와 도시바, 히타치 등 6곳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미드웨이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기념촬영 후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악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샘 올트먼 오픈AI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젠슨 황 CEO, 이 대통령, 혹 탄 브로드컴 CEO,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미 반도체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자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1985년 일본의 폐쇄적인 시장 구조와 반도체 덤핑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듬해 미국과 일본은 일본 시장 개방과 덤핑 수출 방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까지 급등하면서 일 반도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은 약해졌습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이 반도체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며 1987년 보복관세를 부과했고, 협정은 1991년 한 차례 연장됐습니다. 엔고와 통상 압박,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 실패가 겹치면서 일 반도체 산업은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AI 인프라 경쟁 지속…옛날과 달라”
 
다만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을 1980년대 일본과 동일선상에서 보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당시와 달리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별화된 AI 메모리가 등장했고, 글로벌 빅테크가 앞다퉈 AI 데이터센터(AIDC) 투자 나서는 등 수요 기반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김경기 대구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그때와 지금은 시장 환경 자체가 다르다”며 “당시 일본은 사실상 시장을 독점한 뒤 변화에 안주한 측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AI 인프라 투자로 새로운 수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반도체 공급망 구조도 과거와 차이를 보입니다. 조연성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반도체는 최종 소비재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된 중간재”라며 “가격 변화가 미국 기업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과거처럼 공급망을 쉽게 흔들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미국도 첨단산업에서는 자국 기업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가장 큰 변수는 수요 둔화나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라고 진단했습니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인프라 투자를 이어가면서 한국 메모리 기업과의 협력도 더욱 강화되는 분위기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최기영 한국반도체공학회장은 “최근 ‘AI 서밋’을 계기로 국내 메모리 기업과 글로벌 빅테크 간 협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우려가 일정 부분 해소됐다”며 “메모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빅테크의 AI 인프라를 함께 확대하는 상호 보완적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결국 중요한 것은 생산능력 확대”라며 “용인을 비롯한 신규 생산 거점 구축을 서둘러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지속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보라 ·이명신 기자 bora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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