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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광야에 선 한진
2019-02-13 06:00:00 2019-02-13 06:00:00
행동주의 사모펀드 '강성부 펀드(KCGI)'가 한진그룹에 대한 경영감시를 본격화하고 있다. 강성부펀드는 지난달 21일 한진그룹에 지배구조위원회 설치, 적자사업 재검토 등을 요구했다. '한진그룹의 신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이라는 제목의 공개제안을 통해 횃불을 든 것이다. 
 
이어 지난달 31일 이사의 보수 축소 등 몇 가지 요구사항을 담은 주주제안서를 한진칼에 보냈다. 주주제안은 몇 가지 주목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고액 보수로 지탄을 받아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겨냥한 요구도 담겨 있다. 
 
또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쉽게 말해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어 이달 7일에는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달 29일에는 대신지배연구소도 한진그룹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대신증권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진그룹 5개 상장계열사에서 이사회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 사외이사는 최근 3년간 전혀 없었다. 또 대한항공, 한진, 한진칼에서는 대표이사인 총수 일가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와 독립적인 상근 감사 선임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처럼 한진그룹의 봉건적 지배구조를 청산하라는 요구는 점차 커져가고 있다. 강성부펀드라는 ‘토종펀드’가 앞장서고, 다른 시장참가자들이 뒤를 따르는 모양새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 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 홀로 움직일 때와 사뭇 다르다. 
 
삼성물산의 경우에는 KCC라는 우군이라도 있었다. 한진의 경우는 그런 우군이라도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삼성은 외국계 펀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애국주의 정서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토종펀드 앞에서 그런 비합리적 심리를 써먹을 수도 없다. 말하자면 한진은 가중되는 시장의 압력에 맞서야 할 처지이다. 홀로 광야에 서게 된 것이다.
 
한진이 일찍이 공권력으로부터도 이렇게 강한 압력을 받은 일이 없었을 듯하다. 사실은 지금까지 공권력이 만들어준 온실에서 평온한 세월을 누려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총수 일가가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지금 다른 재벌들도 한진그룹과 강성부펀드가 벌이는 이번 힘겨루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갑질을 일삼거나, 복잡한 출자구조 때문에 기업가치가 저하됐거나, 총수 일가가 전횡을 일삼아온 재벌들에게는 이번 힘겨루기가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힘겨루기의 결과는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다. 강성부펀드는 소액주주를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승부는 시장의 힘이 얼마나 결집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런데 국민연금의 태도가 여전히 애매하다. 대한항공의 지주사인 한진칼에 대해 ‘적극적’인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한진칼에 대해 정관변경 주주제안을 제시하지만, 이사해임 안건 등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항공에 대해서는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향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서 대한항공을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했을 뿐이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 11.56%를 가진 2대 주주이다. 또 한진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지분 7.34%를 확보한 3대 주주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행동방향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돼 왔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신중한 논의 끝에 이처럼 알쏭달쏭한 결론을 내놓았다. 검은 백조 혹은 흰 까마귀를 키우는 모양이다.
 
국민연금은 공적연금기관으로서, 강성부펀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지만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으로서의 책임이 막중하다. 기업가치를 떨어뜨리고 시장을 어지럽히는 재벌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와 의무도 있다. 그 책임은 헤라클레스의 괴물 히드라 퇴치 임무보다 더 무겁다. 국민연금이 지금까지 그런 책임을 다했다고 하기 어렵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는 오히려 역행했다. 
 
국민연금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 왔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여전히 어긋난다. 재벌들에게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시장과 국민으로부터는 신뢰를 잃지 않을까 걱정된다.   
 
차기태 언론인 (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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