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1~12일 프랑스 슈퍼마켓 수백 곳의 냉장 설비가 해킹당하면서 냉장고 내부 온도가 섭씨 50도까지 치솟았다. 노르망디의 한 매장은 하룻밤 사이 대량의 식품을 폐기해야 했다. 해커는 냉장 설비를 원격으로 조작했다. 병원이나 금융기관의 전산망이 뚫렸다는 소식은 익숙하지만, 해커가 냉장고의 온도를 높여 식품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낯설었다. 사고는 프랑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일에는 벨기에와 스웨덴, 아일랜드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슈퍼마켓에서 유사한 해킹 피해가 잇따랐다. 냉장·냉동 설비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일부 매장은 식품을 폐기하거나 판매를 중단해야 했다. 불과 3주 만에 비슷한 사고가 반복됐다.
문제는 사고 이후에도 남았다. 일반적인 사이버보험은 식품 부패와 같은 물리적 손실을 보장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피해를 본 슈퍼마켓 체인 인터마르셰 측은 이번 사고가 기존 보험의 보상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피해 책임을 둘러싼 법적 다툼을 예고했다. 냉장 설비 제어 소프트웨어를 공급한 댄포스는 피해 장비 상당수가 보안 업데이트 지원이 끝난 구형 제품이거나 오래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슈퍼마켓들은 냉장 설비 관리를 외부 전문 업체에 맡겨왔다. 제조사와 운영 업체, 관리 업체가 얽혀 있어, 피해를 누가 얼마나 부담해야 할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편리함을 위해 여러 기술을 연결했지만 정작 사고가 나자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남의 나라 슈퍼마켓에서 벌어진 일로만 볼 수 없다. 지난달 28일 GS건설의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 예약관리시스템에 외부의 비정상적인 접근이 발생했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물론 커뮤니티 시설 이용을 위해 등록한 RF카드번호까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어 조사가 진행 중이다. 한국사회도 이미 초연결 사회다. 스마트폰으로 공동현관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집 밖에서도 조명과 냉난방을 제어한다. 얼마나 많은 기능을 연결할 수 있는지가 아파트의 경쟁력이 됐고 첨단 주거 기술은 고급 아파트의 기준이 됐다.
보안 전문가 브루스 슈나이어는 자신의 책 『모두를 죽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2019)에서 해커가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무력화하거나 심장박동기를 조작해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컴퓨터가 자동차를 움직이고 의료기기를 작동시키는 시대에는 해킹이 단순한 정보 유출을 넘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결할 수 있는 기기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관리 대책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미 판매한 기기의 보안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리곤 한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슈퍼마켓은 결국 식품을 폐기한 뒤 냉장 설비의 인터넷 연결을 끊었다. 원격 관리의 편리함보다 식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본래의’ 기능을 택했다.
산업계는 무엇을 얼마나 더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경쟁해왔다. 이제는 무엇을 연결하지 않을 것인지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반드시 얼굴로 문을 열고, 스마트폰으로 집 안의 모든 것을 제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연결된 기기가 늘어날수록, 해킹의 피해도 정보 유출을 넘어 재산과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기술 발전을 거부할 순 없다. 연결의 편리함 외에도, 연결하지 않아도 기본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선택권 역시 주어져야 한다. 연결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순간, 편리함은 또 다른 위협이 된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상상해야 할 때다.
이보라 산업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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